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신학생들이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성령론 시험을 치게 되었는데 한 학생이 다른 과목은 다 공부해서 시험 칠 일이지만 성령론 만큼은 공부해서 시험 칠 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하고 성령 충만 받은 다음에 시험 고사장에 들어갔습니다. 시험지가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 한문제도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받았다고 느낀 학생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요. "하나님 성령론 시험을 치려고 하는데 정말 시험 듭니다. 제가 그렇게 기도하고 시험문제를 받았는데 한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가르쳐 주시옵소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시험지를 낼 시간이 되어 번쩍하고 영감이 옵니다. 정답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다 아십니다. 끝."

교수님이 그 시험지 답안 채점을 해야 되겠는데 난감합니다. 성령님은 다 아시는 것은 맞는 말이기에 틀리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백지를 낸 학생에게 점수를 줄 수도 없어서, 그래서 교수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럴 때는 어떻게 채점을 해야 옳습니까?" 번쩍 영감이 왔습니다. 기가 막힌 채점을 했습니다. "성령님은 다 아시니 100점 학생은 하나도 모르니 0점."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만 성령님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령 받으면 귀신들린 점쟁이처럼 광신적으로 날뛰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성령 받으면 도깨비 방망이같이 자기가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십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성품과 상식과 인격을 말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령은 우리의 상식과 인격을 말살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자는 남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생명 살리는 일을 하게 되고 악령 받은 자는 나를 죽이고 남을 죽이고 생명 죽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인격'이라고 말씀드리니까 손발이 있고 이목구비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격이란 지, 정, 의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느끼고 계시며, 계획하고 계시다 그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과거를 알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미래를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알고 계십니다. 살아 계십니다. 기도하는 인격자이십니다.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 형편과 사정을 알고 우리와 함께 느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체적으로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아멘 요14:16 . 보혜사란 돕는 분을 말합니다. 우리에겐 우리를 돕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멸망된 우리의 영혼을 건져서 영원한 낙원으로 옮겨 주시는 보혜사이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기한이 되어 우리 곁에 계시지 못하게 되자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빌 바를 모를 때에 대신 기도해 주신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농사짓는 일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해를 주시지 않고 비를 주시지 않으면 농사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를 주시고 비를 주신다고 농사가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어야 됩니다. 그 어느 쪽이라도 없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비가 없으면 안 되고, 해와 비가 아무리 적당해도 우리가 심고 거두지 않으면 농사라는 것은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적하신 어떤 목적을 이루시는 것에 우리의 방편들이 필요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되고 기도에 힘을 써야 하는 것 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영역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기도를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의 기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질그릇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이 얼마나 허무하게 깨지는가를 잘 압니다.

어렸을 적에 친구들과 모여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잔재주가 뛰어난 저는 숨기 위하여 높은 담장에 올라가서 옆집으로 펄쩍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그곳에 장독대가 있었고, 뛰어내린 곳이 항아리 위였습니다. 항아리가 사정없이 퍽하고 깨지니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구야~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뛰어 도망가는데 한 발자국 뛸 때마다 장독이 하나씩 퍽퍽퍽 깨지는데 그날 돈 꽤 나 물어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빗자루로 두들겨 맞으면서 제가 깨달은 게 아 질그릇은 허무하게 깨지는 것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깨질 수밖에 없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노부부가 사셨는데 영감님이 기력이 약해 지셨던 모양입니다. 할머니가 자식들을 졸라서 좋다는 보약을 구해 와서 1년을 대접해 드렸는데 처음에는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는 것 같더니 몸이 자꾸 쇠약해졌습니다. 병원에 가서 종합 진찰을 해보니까 그 약이 영감님 체질이 맞질 않아서 간에 엄청 무리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달 만에 장례 치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체질을 모릅니다. 부모가 자녀의 체질을 우리는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 은혜가 필요하고, 언제 무엇이 필요하고,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 연약함이라는 말이 헬라어 원문에 보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연약함들, 우리 연약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성령님은 우리의 수많은 연약함을 도와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