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고 나면 모든 것이 너무 기쁘고, 새롭습니다. 매일 보던 산천초목도 새롭고, 매일 듣던 새소리마저 경이롭게 들립니다. 내가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신 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 기쁘고 행복합니다. 승리가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와 갈등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갈등이라는 말은.. 葛根茶(갈근차)라고 요즈음 많이 마시지요? 즉 칡뿌리로 만든 차를 말합니다. 여기서 '갈'(葛)은 칡넝쿨을 말하고 , '등' (藤)은 등나무를 말합니다. 칡넝쿨과 등나무가 서로 얽혀 풀어갈 길이 안 보인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의 옛 성품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칡넝쿨이 등나무 뿌리를 휘감듯이 우리의 거듭난 성품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내가 과연 크리스천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오리무중으로 만들어 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옳은 일을 해야 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잘못된 습관이나 욕망에 그만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이러한 것을 극복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고 좌절하며 왜 내가 이렇게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며 방황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못하며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 하면서 내안에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이, 아니면 야누스 같이 두 개의 나가 존재 하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하나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나이며 하나는 악을 행하는 나입니다. 일부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며, 일부는 욕망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오늘 7:14-25에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여러분의 고민과 갈등, 혼란을 설명해 줄 것입니다. 엡4:22-24
너희는 유혹(誘惑)의 욕심(慾心)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心靈)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義)와 진리(眞理)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거듭난 사람은 두 가지 본질을 지닌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Two Natures) 벧후 1장 4절에 보면 이 성품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인데 기록되기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至極)히 큰 약속(約束)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約束)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情慾)을 인(因)하여 세상(世上)에서 썩어질 것을 피(避)하여 신(神)의 성품(性品)에 참예(參與)하는 자(者)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 새 성품은 선한 것을 좇으려는 경향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성품입니다. 이 성품은 우리가 믿고 거듭날 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내 안에 옛 성품도 같이 공존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하게 되면서 우리의 마음속은 전쟁터로 변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聖靈)을 좇아 행(行)하라 그리하면 육체(肉體)의 욕심(慾心)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肉體)의 소욕(所欲)은 성령(聖靈)을 거스르고 성령(聖靈)의 소욕(所欲)은 육체(肉體)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對敵)함으로 너희의 원(願)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둘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 이것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옛 성품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채찍으로 내리 친다고 해도 훈련이 되지를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고개를 들고, 또 아우성을 쳐댑니다. 이 갈등의 양상은 우리의 힘으로는 정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이겨내는 방법을 깨우쳐서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이 바울은 모든 성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 이 부분은 바울의 간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이러한 문제로 갈등을 가질 때마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나와 같은 문제를 바울 사도도 같이 겪었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겪는 감정을 적난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좌절되고, 고뇌에 찬 모습을 후진들을 위해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좌절은 바로 율법으로 살려고 한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율법아래 있다는 의미는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힘을 의지해서 선을 행한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좌절만 가져 올 뿐입니다. 점점 더 깊은 분열 만 경험 할 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살았을 때 오는 여기서 5가지의 자신의 모습을 공개 합니다.
1. 나는 문제가 있다고 고백 합니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우리가 영적인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을 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 입니까? 네 여러분과 제가 두 가지 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악은 시시때때로 나를 주장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7장 전체에는 “나”라는 단어가 무려 27번이나 나옵니다. Self를 나타냅니다. 바로 옛 성품입니다.
우리의 성화를 방해 하는 세력 중에 사실은 가장 큰 적이 바로 육신으로 불리는 우리의 옛 성품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의 풍조요, 마지막은 마귀입니다.
2. 나는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롬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3-14권의 신약을 쓴 바울 사도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행하는 것 원하는 것은 행치 아니하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모순 앞에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기독교인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은 다르리라고, 오늘은 이러한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리라고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하루의 끝을 돌이켜 보면 얼마나 허망하게 실패를 경험 하는지 모릅니다.
3. 나는 좌절 한다는 것입니다.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나는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것을 내 삶에서 뽑아낼 능력이 없는 것을 발견 할 때 우리는 절망 하고, 좌절 합니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여러분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를 기억 하실 것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기도 하라고 말씀 하셨지만 그들은 잠에 빠져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하신 말씀이 마26:3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물론 우리의 의지력으로 어느 정도 지탱은 합니다. 그러나 결국엔 육신의 소욕에 넘어져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일종의 중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담배를 피워 보신 분들은 잘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끊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지력에 한계를 발견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여기서 선을 행할 마음이 있으나 그것을 실행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혼란에 빠져 있고 좌절 했으며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계속)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와 갈등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갈등이라는 말은.. 葛根茶(갈근차)라고 요즈음 많이 마시지요? 즉 칡뿌리로 만든 차를 말합니다. 여기서 '갈'(葛)은 칡넝쿨을 말하고 , '등' (藤)은 등나무를 말합니다. 칡넝쿨과 등나무가 서로 얽혀 풀어갈 길이 안 보인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의 옛 성품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칡넝쿨이 등나무 뿌리를 휘감듯이 우리의 거듭난 성품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내가 과연 크리스천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오리무중으로 만들어 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옳은 일을 해야 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잘못된 습관이나 욕망에 그만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이러한 것을 극복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고 좌절하며 왜 내가 이렇게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며 방황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못하며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 하면서 내안에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이, 아니면 야누스 같이 두 개의 나가 존재 하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하나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나이며 하나는 악을 행하는 나입니다. 일부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며, 일부는 욕망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오늘 7:14-25에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여러분의 고민과 갈등, 혼란을 설명해 줄 것입니다. 엡4:22-24
너희는 유혹(誘惑)의 욕심(慾心)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心靈)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義)와 진리(眞理)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거듭난 사람은 두 가지 본질을 지닌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Two Natures) 벧후 1장 4절에 보면 이 성품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인데 기록되기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至極)히 큰 약속(約束)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約束)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情慾)을 인(因)하여 세상(世上)에서 썩어질 것을 피(避)하여 신(神)의 성품(性品)에 참예(參與)하는 자(者)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 새 성품은 선한 것을 좇으려는 경향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성품입니다. 이 성품은 우리가 믿고 거듭날 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내 안에 옛 성품도 같이 공존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하게 되면서 우리의 마음속은 전쟁터로 변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聖靈)을 좇아 행(行)하라 그리하면 육체(肉體)의 욕심(慾心)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肉體)의 소욕(所欲)은 성령(聖靈)을 거스르고 성령(聖靈)의 소욕(所欲)은 육체(肉體)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對敵)함으로 너희의 원(願)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둘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 이것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옛 성품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채찍으로 내리 친다고 해도 훈련이 되지를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고개를 들고, 또 아우성을 쳐댑니다. 이 갈등의 양상은 우리의 힘으로는 정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이겨내는 방법을 깨우쳐서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이 바울은 모든 성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 이 부분은 바울의 간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이러한 문제로 갈등을 가질 때마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나와 같은 문제를 바울 사도도 같이 겪었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겪는 감정을 적난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좌절되고, 고뇌에 찬 모습을 후진들을 위해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좌절은 바로 율법으로 살려고 한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율법아래 있다는 의미는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힘을 의지해서 선을 행한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좌절만 가져 올 뿐입니다. 점점 더 깊은 분열 만 경험 할 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살았을 때 오는 여기서 5가지의 자신의 모습을 공개 합니다.
1. 나는 문제가 있다고 고백 합니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우리가 영적인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을 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 입니까? 네 여러분과 제가 두 가지 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악은 시시때때로 나를 주장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7장 전체에는 “나”라는 단어가 무려 27번이나 나옵니다. Self를 나타냅니다. 바로 옛 성품입니다.
우리의 성화를 방해 하는 세력 중에 사실은 가장 큰 적이 바로 육신으로 불리는 우리의 옛 성품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의 풍조요, 마지막은 마귀입니다.
2. 나는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롬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3-14권의 신약을 쓴 바울 사도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행하는 것 원하는 것은 행치 아니하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모순 앞에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기독교인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은 다르리라고, 오늘은 이러한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리라고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하루의 끝을 돌이켜 보면 얼마나 허망하게 실패를 경험 하는지 모릅니다.
3. 나는 좌절 한다는 것입니다.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나는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것을 내 삶에서 뽑아낼 능력이 없는 것을 발견 할 때 우리는 절망 하고, 좌절 합니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여러분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를 기억 하실 것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기도 하라고 말씀 하셨지만 그들은 잠에 빠져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하신 말씀이 마26:3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물론 우리의 의지력으로 어느 정도 지탱은 합니다. 그러나 결국엔 육신의 소욕에 넘어져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일종의 중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담배를 피워 보신 분들은 잘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끊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지력에 한계를 발견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여기서 선을 행할 마음이 있으나 그것을 실행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혼란에 빠져 있고 좌절 했으며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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