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기역(ㄱ)자 교회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자리잡고 있다. 금년이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기에 금산교회의 출발은 1905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데이트(한국명, 최의덕)는 김제 금산 마방(馬房)에 자신의 말을 맡겨 놓고 조덕삼이라는 지주집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 만나게 된다. 이때 사랑채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이자익 마부를 만나, 함께 최의덕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있었다.

“아저씨, 기독교는 조선을 근대화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아저씨도 예수를 믿기만 새로운 모습으로 생각이 변화가 됩니다.”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전주에 미국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바로 최의덕 선교사가 그분이가요.”

이렇게 조덕삼과 이자익을 만났던 최의덕 선교사는 쪽복음을 주고 이 집을 빠저 나왔다. 다시 최의덕 선교사는 전도의 가능성을 알고 금산리를 방문하였다.

“선교사님, 다음에 오셔서 아예 우리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지요,”

이렇게 시작한 교회가 금산교회이며, 지주가 마부 머슴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금산리는 예로부터 신흥 종교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주 조덕삼 덕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금산리 사람들이 선교사를 구경하기 위해서 모여든 것이 어느덧 교회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1908년 때마침 제각을 헌다는 말을 들었던 조덕삼은 교인들과 동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제각을 헐어서 조덕삼 과수원에 교회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이 때 신축했던 교회당은 최의덕 선교사의 집례로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점점 좋은 소식이 입에 입을 통해서 이 동네 저 동네로 알려지면서 어느덧 장로를 선출할 수 있도록 성장하게 됐다.

그런데 장로를 선출할 때 모든 교인들은 조덕삼 지주가 될 줄 알았는데, 그만 조덕삼은 떨어지고 마주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교인 여러분들,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자익 집사가 우리집에 있지만 믿음이 아주 훌륭합니다.”

이 때 모든 교인들은 놀라고 말았다. 이후 최의덕 선교사가 금산교회에 못 오게 되면 설교는 머슴 이자익의 몫이었다. 이때 조덕삼은 머슴 마부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2년 후에 그도 장로로 선출되었다. 조덕삼 장로는 자신이 장로 된 일과 또 이자익의 그 영특한 머리에 놀라 그를 불렀다.

“장로님, 내년 봄에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유학을 보내드릴 터이니 그렇게 알고 더 열심히 기도하시기를 부탁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자익 장로는 조덕삼 장로의 풀 스칼라십을 받고 평양으로 유학을 하게 됐다. 또한 그가 목사가 되자 조덕삼 장로는 교인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금산교회 2대 목사로 청빙을 하였다. 전라노회나 총회에는 온통 이자익 목사의 소문이 자자하게 났었다. 그를 목사로 깍듯이 받들었던 조덕삼 장로는 1919년 12월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후 조덕삼 장로의 후광을 받았던 이자익 목사는 장로교 총회에서 3회(1924, 1947, 1948) 에 걸쳐 총회장을 역임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일에 모두들 놀라고 말았다. 이 일은 한국 장로교 역사상 처음이고 마지막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6.25 전쟁으로 금산교회도 보통 어려움을 겪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모악산 밑에 자리를 잡았던 교회 인지라 교인 중에 빨치산과 우익이 나뉘어 결국 금산리에 모든 주택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불타고 말았다. 그런데 빨치산이나 우익이나 자신의 믿음의 고향인 교회만은 서로 불을 지르지 말자 하여 그 교회가 100주년을 맞게 되었다, 그 교회의 역사성 때문에 하루에도 200-300명의 순례자들이 온다고 한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