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목사의 증조부는 홍경래의 난 당시 역적으로 몰려 고난을 당했다. 그때 사형을 당할 뻔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황해도 구월산에 몸을 피했다. 그의 부친은 고향인 평양으로 다시 돌아와 신분을 감추고 농민으로 행세하며 살았다. 1868년 11월 21일, 이기풍 목사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이기풍은 어려서부터 재치있고 슬기로워 신동으로 불렸다. 여섯살 때는 사서오경을 줄줄 외웠으며, 묵화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어른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열두살 때는 붓글씨 백일장에서 장원이 됐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음에도 증조부의 역적죄로 인해 이기풍은 관료가 될 수 없었다. 의식있는 민족주의자였던 이기풍은 외세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조선이 몰락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세상에서 출세하고 싶은 마음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은 혈기방자한 청년 이기풍의 성품을 급하고 괄괄하게 만들었다. 술과 박치기의 명수로도 알려진 이기풍은 당시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술이 가득 취해 평양 거리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마침 평양좌수의 행차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도도하게 말을 탄 것에 비위가 상하자 그는 평양좌수를 끌어내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 사건으로 청년 이기풍은 석달 동안이나 목에 형틀을 쓰고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후 1885년 어느 날 이기풍은 길거리에서 생전 처음으로 코가 큰 백인을 만난다. 한국에서는 보기드문 큰 체구인데다 도도한 몸짓으로 가슴을 내밀고 가는 모습이 이기풍의 비위를 건드렸다. “저 양코배기가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에 왔을까? 저것들도 날도둑놈들이 아닌가? 저 놈들을 우리 나라에서 하루바삐 몰아내자”고 생각했다. 그날 밤 이기풍은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그 백인(마포삼열 선교사)의 집에 몰려가 돌을 우박같이 쏟아부었다. 물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심하게 났지만, 준비한 돌을 모두 던져도 인기척이 없었다. 거만한 양코배기와 직접 대결하지 못한 것이 분했지만,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한달이 지난 어느 날, 장터를 건들거리며 지나던 청년 이기풍은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친구들과 함께 돌 공격을 감행했던 백인이 서투른 조선말로 사람들에게 무언가 가르치고 있었다. 성격이 고약한 청년 이기풍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를 향해 다시 돌을 날렸다. 던진 돌은 성경을 가르치던 마포삼열 선교사의 턱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땅바닥에 거꾸러졌고, 피가 낭자하게 흘러 바닥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군중들은 모두 두려워서 흩어졌고, 이기풍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그 자리를 떠났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가 살던 평양성에도 전쟁이 극심해졌다. 집집마다 말할 수 없는 기근으로 허덕이게 됐다. 방 안에 혼자 박혀있는 게 너무 답답해서 원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기고만장했던 패기도 모두 사라지고 풀이 꺾인 채 그곳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기풍은 친구들의 권유로 담뱃대에 그림을 새겨 팔기로 했다.

어느 날 담뱃대를 한 묶음 손에 들고 힘없이 걸어가다 길가에서 코 큰 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보게 된다. 이기풍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평양에서 돌로 친 양코배기의 화신이 원산까지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풍의 양심은 갑자기 괴로워졌고, 꿈에서 자신을 나무라는 사람(예수)를 만나게 된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 되도록 과거에 저지른 죄를 회개했다. 지난날 저지른 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나서 가슴을 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통곡했다. 전도자 김석필은 그런 이기풍의 손목을 잡고 선교사 스왈른의 집으로 데려갔다.

이기풍의 진솔한 자백을 들은 스왈른 선교사는 “분명히 당신을 예수님이 귀하게 쓰실 것이요. 형제의 죄는 이미 예수님이 사하여 주셨소”라고 말했다. 이기풍은 지난날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저지른 죄를 스왈른에게 모두 고백하고 회개한 이후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1898년부터 함경도 일대에서 성경 반포 및 전도 사역을 하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에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돼, 장로교단의 효시인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면서 제주 선교사로 파송됐다. 1919년 광주 북문내교회 초대목사가 된 이후에도 제주 선교에는 늘 관심을 기울였다. 1920년 전라도 장로회총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에 완강히 거부하며 호남지방 교회 지도자들과 반대투쟁을 하다 체포돼,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1942년 6월 20일 오전 8시에 쉼을 얻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성령의 강권적인 간섭과 사역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세상에서 막 살았던 사람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성령은 강철도 녹이며 다이아몬드도 가볍게 파괴한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삼위 하나님의 작정이요,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