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최근 한국 교회는 선교의 부정적 면을 보면서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있고 선교 정책을 질책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의 문제점이 선교단체나 선교사들의 책임이라면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기도하고 후원했던 교회도 같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선교의 혼란이 한국 사람들의 급하게 서두르는 습성이나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생각 때문이라면 한국인들의 기질이나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기질 문제인데, 이것을 놓고 아무도 돌을 던질 사람은 없으리라고 본다. 선교지에서의 혼란은 한국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선교사들의 있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우리는 잘못해도 주님은 잘못되실 수 없고, 주님의 지상명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중요한 사명이다. 성숙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선교가 어려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국인으로서 선교를 수행하기가 벅차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심한 경쟁력, 이권 다툼으로 인한 갈등, 교파주의의 개교회 확장주의 같은 것들은 한국 교회 안에 있는 고질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선교지로 가는 사람도 이 문화 속에서 자랐기에 그것 외에는 본 것이 없다.
게다가 한국인은 단일 문화권에서 단일 언어를 구사하면서 자라났다. 다양한 문화와 민족 속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순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민족을 쓰시기 위해 교회에 부흥을 주셨고 그 여파로 선교의 사명을 깨닫게 하셨다. 이 사명을 따라 선교사들을 본격적으로 파송한 지도 40년이 흘러갔다. 성숙한 나이가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향방 없이 뛰기만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치 지구라는 큰 밭에다 아무렇게나 뿌려 놓은 씨와 같다고나 할까? 이제 솎아 내야 할 것은 솎아내고, 이종해야 할 것은 이종해야 하는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야 할 때이다.
'과거는 미래의 선생'이라고 생각한다면 과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과거에서 얻을 교훈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주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고, 해결점을 하나하나 찾아 나가야 한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 선교의 불을 붙여야 한다.
종종 사람들은 해외 선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람이 문제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만다. 모처럼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주신 사명을 빼앗기거나 선교 사명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과 지혜를 찾아야 한다.
성령이 하시는 일
만일 한 도시의 교회가 멀지 않은 농촌에 개척 교회를 시작했다면 성도들이 현장을 가 보기도 하고, 보고도 쉽게 받아 가면서 보람 있는 지원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먼 타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역은 쉽게 가 보기도 힘들고, 선교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말도 통하지 않아 선교 현장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다. 또 중국과 같이 늘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든지, 창의적 접근지역처럼 선교의 열매를 찾기가 쉽지 않은 곳에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지원만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재미없는 사역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는 약 14,000여 명의 선교사들을 180여 개국으로 보냈다. 선교비도 일년에 수백억씩이나 선교지로 보낸다. 보이지도 않고, 끝도 없는 일을 계속 지원한다는 것은 교회의 사명의식만 가지고는 쉽지 않다고 본다. 순전히 성령께서 한국 교회들을 감동시키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 역사하셧던 그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에 명령하셨던 그 성령께서 한국 교회에 말씀하셨고, 감동시키신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일어난 한국 교회의 선교운동이기에 교회들도, 선교사들도 두려운 마음으로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 장애물들은 제거해야 하고, 부정적 요소들은 계속 고쳐 나가는 것이지 포기가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다시 예루살렘에 도달할 때까지, '마지막 주자'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뛰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두고 있다.(롬 11:25-27)이스라엘이 회개할 때는 주님이 오실 날이 되었다고 인식하게 된다. 그때까지 교회는 선교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한국에 처음 들어온 복음은 1907년 부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회, 정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명실 공히 민족을 위한 종교로 자리매김을 했다. 한국 근대화를 이루는 데 기독교의 역할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은 교회로 인하여 축복받았고, 지금 한국 교회는 여러 면에서 그 축복을 구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선교는 이 축복을 어떻게 다른 민족에게나누어 주느냐 하는 문제이다. 교회당 건물이 축복의 상징이 될 수 없고, 사람의 숫자나 헌금 액수의 많음이 축복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이제 한국 교회의 축복의 상징은 얼마큼 나누어 줄큰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의 축복은 그 대상에 있지 않고 나누는 당사자에게 있으며, 선교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할 때 우리는 무조건 나누어 주어야 할 이유를 찾는다. 물론 선교지는 조국 교회가 나누어 주는 자원을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주는 사람들은 어떻게 쓰느냐를 묻기보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느냐를 물어야 한다.
약해진 우리 교회는 줌으로써 강해질 수 있고 성숙해질 수 있다.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건강의 문제가 없듯이, 일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다. 세계의 교회들은 한국 교회가 더 훌륭한 역할을 해주기를 간곡히 기대하고 있다. 이 기대에 부응할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 교회의 미래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최근 한국 교회는 선교의 부정적 면을 보면서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있고 선교 정책을 질책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의 문제점이 선교단체나 선교사들의 책임이라면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기도하고 후원했던 교회도 같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선교의 혼란이 한국 사람들의 급하게 서두르는 습성이나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생각 때문이라면 한국인들의 기질이나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기질 문제인데, 이것을 놓고 아무도 돌을 던질 사람은 없으리라고 본다. 선교지에서의 혼란은 한국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선교사들의 있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우리는 잘못해도 주님은 잘못되실 수 없고, 주님의 지상명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중요한 사명이다. 성숙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선교가 어려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국인으로서 선교를 수행하기가 벅차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심한 경쟁력, 이권 다툼으로 인한 갈등, 교파주의의 개교회 확장주의 같은 것들은 한국 교회 안에 있는 고질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선교지로 가는 사람도 이 문화 속에서 자랐기에 그것 외에는 본 것이 없다.
게다가 한국인은 단일 문화권에서 단일 언어를 구사하면서 자라났다. 다양한 문화와 민족 속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순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민족을 쓰시기 위해 교회에 부흥을 주셨고 그 여파로 선교의 사명을 깨닫게 하셨다. 이 사명을 따라 선교사들을 본격적으로 파송한 지도 40년이 흘러갔다. 성숙한 나이가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향방 없이 뛰기만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치 지구라는 큰 밭에다 아무렇게나 뿌려 놓은 씨와 같다고나 할까? 이제 솎아 내야 할 것은 솎아내고, 이종해야 할 것은 이종해야 하는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야 할 때이다.
'과거는 미래의 선생'이라고 생각한다면 과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과거에서 얻을 교훈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주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고, 해결점을 하나하나 찾아 나가야 한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 선교의 불을 붙여야 한다.
종종 사람들은 해외 선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람이 문제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만다. 모처럼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주신 사명을 빼앗기거나 선교 사명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과 지혜를 찾아야 한다.
성령이 하시는 일
만일 한 도시의 교회가 멀지 않은 농촌에 개척 교회를 시작했다면 성도들이 현장을 가 보기도 하고, 보고도 쉽게 받아 가면서 보람 있는 지원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먼 타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역은 쉽게 가 보기도 힘들고, 선교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말도 통하지 않아 선교 현장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다. 또 중국과 같이 늘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든지, 창의적 접근지역처럼 선교의 열매를 찾기가 쉽지 않은 곳에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지원만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재미없는 사역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는 약 14,000여 명의 선교사들을 180여 개국으로 보냈다. 선교비도 일년에 수백억씩이나 선교지로 보낸다. 보이지도 않고, 끝도 없는 일을 계속 지원한다는 것은 교회의 사명의식만 가지고는 쉽지 않다고 본다. 순전히 성령께서 한국 교회들을 감동시키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 역사하셧던 그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에 명령하셨던 그 성령께서 한국 교회에 말씀하셨고, 감동시키신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일어난 한국 교회의 선교운동이기에 교회들도, 선교사들도 두려운 마음으로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 장애물들은 제거해야 하고, 부정적 요소들은 계속 고쳐 나가는 것이지 포기가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다시 예루살렘에 도달할 때까지, '마지막 주자'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뛰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두고 있다.(롬 11:25-27)이스라엘이 회개할 때는 주님이 오실 날이 되었다고 인식하게 된다. 그때까지 교회는 선교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한국에 처음 들어온 복음은 1907년 부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회, 정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명실 공히 민족을 위한 종교로 자리매김을 했다. 한국 근대화를 이루는 데 기독교의 역할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은 교회로 인하여 축복받았고, 지금 한국 교회는 여러 면에서 그 축복을 구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선교는 이 축복을 어떻게 다른 민족에게나누어 주느냐 하는 문제이다. 교회당 건물이 축복의 상징이 될 수 없고, 사람의 숫자나 헌금 액수의 많음이 축복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이제 한국 교회의 축복의 상징은 얼마큼 나누어 줄큰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의 축복은 그 대상에 있지 않고 나누는 당사자에게 있으며, 선교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할 때 우리는 무조건 나누어 주어야 할 이유를 찾는다. 물론 선교지는 조국 교회가 나누어 주는 자원을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주는 사람들은 어떻게 쓰느냐를 묻기보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느냐를 물어야 한다.
약해진 우리 교회는 줌으로써 강해질 수 있고 성숙해질 수 있다.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건강의 문제가 없듯이, 일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다. 세계의 교회들은 한국 교회가 더 훌륭한 역할을 해주기를 간곡히 기대하고 있다. 이 기대에 부응할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 교회의 미래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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