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감독 히딩크가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고 말했죠. 저는 그 말을 좋아합니다. 목사는 영혼 구원에 늘 배고파야죠. "
1997년부터 올해로 13년째 장로교의 본산지 스코틀랜드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는 김위식 목사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1957년 충남 서천군 산천리에서 태어나 어려운 시절 가난한 살림에 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을 정도로 늘 배고프게 살며 어머니에게 "어매, 색시 얻으면 쌀 두가마니로 밥 해달라 할꺼야."라고 하던 김 선교사였다.
12살부터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다 장사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나무를 하고 오던 중에 넘어져 엉겅퀴 가시에 온 몸을 찔린 적도 있었다. 잊지 못할 사건이었는데 김 선교사가 한 번 더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김 선교사가 스코틀랜드에 나가 보니 엉겅퀴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엉겅퀴 나무의 꽃은 그 나라의 국화이기도 했다.
한편 김 선교사의 가족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살 길을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김 선교사는 낮에는 구두를 닦으며 밤에는 야학에 다녔다. 구두 닦아 번 10원, 50원, 100원 뭉치로 한 봉투에는 십일조를, 한 봉투에는 감사헌금을 만들어 눈물로 드리곤 했다.
중학교 2학년이던 15살에는 결핵늑막염에 걸려 임종 선고를 받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한번만 살려주시면 세상에 가서 좋은 일 하겠습니다.'고 기도했다.
기도의 응답으로 병원에서도 손쓸 수 없던 병이 깨끗하게 나아 김 선교사는 목사나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했다. 영혼을 구원하는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검정고시로 학교를 마치고 김 선교사는 신학교를 입학했다. 그때 김 선교사는 톱과 낫을 들고 사역도 같이 시작했다. 그 톱과 낫으로 직접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충북 청원 골짜기에서 시각 장애인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다 김 선교사는 6개월간 간절히 기도하며 졸업 후에는 인도로 선교를 가겠다 마음먹었다. 밑바닥의 가난을 경험해보았기에 가난한 나라 인도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방향을 틀어 장로교의 본산지 스코틀랜드로 1997년 김 선교사 가정을 보냈다.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김 선교사의 가정을 그 땅에 떨어뜨려 놓으셨다. 한국에서도 IMF가 터져 지원이 끊긴 상황이었다. 한인 하나 없는 그 땅에서 김 선교사는 때로는 40일간 감자수제비로 연명하기도 했다. 김 선교사에게 초청장을 써준 스코틀랜드교회에서 토요일이면 홈리스들에게 나눠주는 빵. 우유. 소시지. 고기가 든 선물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기도 했다. 한번은 근처 바다에 가서 고등어를 주워 요리해 먹기도 했다. 그러나 3일을 온가족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줄 서는 해프닝도 있었다.
GNP가 3만 불인 땅에 빵과 고기가 넘쳐났지만 영혼을 살려보겠다는 뜨거움 하나로 그 땅에 간 선교사의 가정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주변에 한인도 없어 말할 대상이 없으니 때로는 뚜껑 없는 감옥에 갇힌 것 같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는 뚜껑 없는 감옥이 있다.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영국의 메리 여왕은 젊은 부부와 어린 세 자녀 등 일가족 5명을 뚜껑 없는 감옥에 수감하고 그 가족에게 “주 예수에 대해 믿음을 지키려면 그 안에서 죽으라. 만일 살고 싶거든 신앙을 포기하고 담을 넘어 집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했던 바울 사도와 같이 김 선교사는 어려운 상황들을 그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 하나 붙들고 뚫고 나갔다. 김 선교사는 앤드류 카네기 공원을 하루에 일곱 바퀴씩 돌며 풀뿌리를 붙잡고 기도했다. '머리를 때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당황되기도 했지만 마침 지나가던 청년 무리들 중 한 청년의 머리를 비비며 기도했다. 청년 역시 당황했지만 기도를 받고는 감사를 표했다. 한번은 실의에 빠져 공원 벤치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청년을 붙잡고 기도했더니, 얼마 후 경찰이 사이렌을 울리며 찾아오기도 했다. 지나가다 청년을 붙들고 등을 두드리며 기도하는 장면을 본 사람이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김 선교사는 다가오는 경찰 머리를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기도를 받은 후 현장의 상황을 듣고는 실의에 빠진 청년을 위로해줘 감사하다고 하더란다.
그 일 이후로 김 선교사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하루는 유리가게에 들어갔다. 젊은 청년에게 김 선교사는 창세기 1장 1절을 선포했다. 그 한마디를 듣고 청년은 눈물을 흘렸다. 수십 년 그곳에 있었지만 어느 백인도 자신에게 전도한 적이 없었는데 황인종이 와서 전도한 것에 감동한 것이다. 그 청년은 다음 주 김 선교사가 협력 사역하는 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는 김 선교사를 앞으로 나오게 해 영어가 불편한 이 친구도 이렇게 전도했다며 김 선교사를 칭찬하고 성도들에게 도전을 줬다. 그 영향으로 그때 30-40명이던 그 교회가 지금은 3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부흥했다고 한다.
한번은 터키 식당에서 피자 가게에서 무보수로 접시 닦는 일을 하던 김 선교사가 무슬림 식당 주인에게 가정예배에 와보기를 권했다. 3개월 만에 마음 문을 열고 예배에 참석한 그 친구는 예수를 믿게 됐고 신학교까지 가게 됐다. 그리고 터키에 가서 어머니도 전도하고 결혼해 아내도 전도했다. 물론 태어난 그의 딸도 크리스천이 됐다. 김 선교사는 이 한 사람을 통해 터키가 뒤집어 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김 선교사는 "전도는 말에 있지 않다. 언어에 있지 않다."며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닮으라."고 강조한다.
사역이 13년째를 맞는 지금도 김 선교사는 주님께서 부족한 종을 들어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다리(Bridge)로 사용하심에 감사하고 감격한다. <계속>
1997년부터 올해로 13년째 장로교의 본산지 스코틀랜드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는 김위식 목사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1957년 충남 서천군 산천리에서 태어나 어려운 시절 가난한 살림에 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을 정도로 늘 배고프게 살며 어머니에게 "어매, 색시 얻으면 쌀 두가마니로 밥 해달라 할꺼야."라고 하던 김 선교사였다.
12살부터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다 장사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나무를 하고 오던 중에 넘어져 엉겅퀴 가시에 온 몸을 찔린 적도 있었다. 잊지 못할 사건이었는데 김 선교사가 한 번 더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김 선교사가 스코틀랜드에 나가 보니 엉겅퀴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엉겅퀴 나무의 꽃은 그 나라의 국화이기도 했다.
한편 김 선교사의 가족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살 길을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김 선교사는 낮에는 구두를 닦으며 밤에는 야학에 다녔다. 구두 닦아 번 10원, 50원, 100원 뭉치로 한 봉투에는 십일조를, 한 봉투에는 감사헌금을 만들어 눈물로 드리곤 했다.
중학교 2학년이던 15살에는 결핵늑막염에 걸려 임종 선고를 받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한번만 살려주시면 세상에 가서 좋은 일 하겠습니다.'고 기도했다.
기도의 응답으로 병원에서도 손쓸 수 없던 병이 깨끗하게 나아 김 선교사는 목사나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했다. 영혼을 구원하는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검정고시로 학교를 마치고 김 선교사는 신학교를 입학했다. 그때 김 선교사는 톱과 낫을 들고 사역도 같이 시작했다. 그 톱과 낫으로 직접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충북 청원 골짜기에서 시각 장애인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다 김 선교사는 6개월간 간절히 기도하며 졸업 후에는 인도로 선교를 가겠다 마음먹었다. 밑바닥의 가난을 경험해보았기에 가난한 나라 인도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방향을 틀어 장로교의 본산지 스코틀랜드로 1997년 김 선교사 가정을 보냈다.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김 선교사의 가정을 그 땅에 떨어뜨려 놓으셨다. 한국에서도 IMF가 터져 지원이 끊긴 상황이었다. 한인 하나 없는 그 땅에서 김 선교사는 때로는 40일간 감자수제비로 연명하기도 했다. 김 선교사에게 초청장을 써준 스코틀랜드교회에서 토요일이면 홈리스들에게 나눠주는 빵. 우유. 소시지. 고기가 든 선물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기도 했다. 한번은 근처 바다에 가서 고등어를 주워 요리해 먹기도 했다. 그러나 3일을 온가족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줄 서는 해프닝도 있었다.
GNP가 3만 불인 땅에 빵과 고기가 넘쳐났지만 영혼을 살려보겠다는 뜨거움 하나로 그 땅에 간 선교사의 가정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주변에 한인도 없어 말할 대상이 없으니 때로는 뚜껑 없는 감옥에 갇힌 것 같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는 뚜껑 없는 감옥이 있다.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영국의 메리 여왕은 젊은 부부와 어린 세 자녀 등 일가족 5명을 뚜껑 없는 감옥에 수감하고 그 가족에게 “주 예수에 대해 믿음을 지키려면 그 안에서 죽으라. 만일 살고 싶거든 신앙을 포기하고 담을 넘어 집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했던 바울 사도와 같이 김 선교사는 어려운 상황들을 그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 하나 붙들고 뚫고 나갔다. 김 선교사는 앤드류 카네기 공원을 하루에 일곱 바퀴씩 돌며 풀뿌리를 붙잡고 기도했다. '머리를 때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당황되기도 했지만 마침 지나가던 청년 무리들 중 한 청년의 머리를 비비며 기도했다. 청년 역시 당황했지만 기도를 받고는 감사를 표했다. 한번은 실의에 빠져 공원 벤치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청년을 붙잡고 기도했더니, 얼마 후 경찰이 사이렌을 울리며 찾아오기도 했다. 지나가다 청년을 붙들고 등을 두드리며 기도하는 장면을 본 사람이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김 선교사는 다가오는 경찰 머리를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기도를 받은 후 현장의 상황을 듣고는 실의에 빠진 청년을 위로해줘 감사하다고 하더란다.
그 일 이후로 김 선교사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하루는 유리가게에 들어갔다. 젊은 청년에게 김 선교사는 창세기 1장 1절을 선포했다. 그 한마디를 듣고 청년은 눈물을 흘렸다. 수십 년 그곳에 있었지만 어느 백인도 자신에게 전도한 적이 없었는데 황인종이 와서 전도한 것에 감동한 것이다. 그 청년은 다음 주 김 선교사가 협력 사역하는 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는 김 선교사를 앞으로 나오게 해 영어가 불편한 이 친구도 이렇게 전도했다며 김 선교사를 칭찬하고 성도들에게 도전을 줬다. 그 영향으로 그때 30-40명이던 그 교회가 지금은 3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부흥했다고 한다.
한번은 터키 식당에서 피자 가게에서 무보수로 접시 닦는 일을 하던 김 선교사가 무슬림 식당 주인에게 가정예배에 와보기를 권했다. 3개월 만에 마음 문을 열고 예배에 참석한 그 친구는 예수를 믿게 됐고 신학교까지 가게 됐다. 그리고 터키에 가서 어머니도 전도하고 결혼해 아내도 전도했다. 물론 태어난 그의 딸도 크리스천이 됐다. 김 선교사는 이 한 사람을 통해 터키가 뒤집어 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김 선교사는 "전도는 말에 있지 않다. 언어에 있지 않다."며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닮으라."고 강조한다.
사역이 13년째를 맞는 지금도 김 선교사는 주님께서 부족한 종을 들어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다리(Bridge)로 사용하심에 감사하고 감격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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