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부 흑인들이 한인 상점 앞에서 데모

1988년 9월과 10월에 일어난 한인 상점 불매 운동이 일단 진화되었지만, 한인 상점에 대한 흑인들의 불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애틀랜타에서도 흑인들의 불만은 종종 외부로 표출되었고, 한인 사회 특히 한인 식품업계는 긴장 속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흑인들의 불만을 진화하려는 한인 사회 지도자들의 노력이 없었으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의 한인사회 지도자들은 흑인 커뮤니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0년대 후반의 분위기는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흑인들의 이러한 불만이 결국 폭발한 것이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과 더불어 일어난 애틀랜타 5•1 흑인 폭동이었다. 1990년 2월 20일 한국일보 애틀랜타 김학규 지사장이 작성한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990년 2월 초부터 애틀랜타 흑인가에는 한인 경영 식품점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흑인들은 한인 상점에서 썩은 고기와 상한 음식•야채를 판다는 소문을 내고 증거를 확보한 후 지난 주 초에는 Decatur에서 데모를 하였고, 이어 2월 14일에는 다운타운 근처의 한인 상점에서 흑인 7명이 약 30분간 데모를 하였다.

이에 따라 애틀랜타 한인 단체장들은 흑인들의 데모 규모가 커질 것에 대비하여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2월 13일에는 강서회관에서 한인회장과 한인 식품협회가 주관이 되어 단체장 회의를 열고 대책을 토의하였다. 또한 2월 14일에는 한인회 한기대 부회장, 최수일 상공회의소 회장, 이규종 식품협회장, 강석영 전 한인회장이 흑인가의 리더 R. Stewart 목사 등 3명과 조선옥에서 회동하여 한인 커뮤니티의 실정과 상황을 설명하였고, 자주 만나 유대를 갖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이규종 식품협회 회장이 흑인 지역에 주는 성금의 통일성을 기하는 데에도 R. Stewart 목사와 합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