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최초의 여성판사,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인 시린 에바디 변호사(62)가 9일(주일) 경동교회(담임 박종화 목사)를 방문했다. 한국을 방문해 여러 종단을 찾아가 대화를 나눈 그녀는 경동교회에서는 “이슬람과 인권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시린 에바디 변호사는 강연을 통해 “민주주의의 틀은 인권을 관장하는 규칙”이라며 “어떤 정부든 종교를 구실로 해서 사람들에게, 특히 여성들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 “어떤 정부도 자기들의 이데올로기를 구실로 자유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정부는 자신들의 합법성을 사람들과 인권존중에서 찾아야 한다”며 “어떤 구실이든 인권을 무시하는 구실은, 문화든 종교든 이데올로기든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받은 터키, 이란 정부들도 이런 인권 원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질의응답 시간 이란의 핵 문제에 대해 “이란은 석유와 가스, 태양열, 바람 등 천연자원을 풍부하게 갖고 있다”고 말하고, “개인적으로는 태양력 발전소가 우라늄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현재 자신도 중동지역 핵무기 개발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또 현존하는 이란의 문제들에 대해 원인이 이슬람 종교에 있는지 아니면 정치적인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이슬람 성직자들과 이란 정부가 서로 상충되는 의견을 내기도 하는데, 정부는 자신들만의 이슬람 해석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고 했다.

청년들의 민주운동에 대해서도 “이란에서의 대학생들의 민주주의 운동은 굉장히 활발하고 적극적”이라며 “대학생 한 사람을 더 체포해 가면 더 많은 대학생들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전했다.

시린 에바디 변호사는 “이슬람 국가 중 좀 더 평화로운 국가는 사람들이 교육을 더 많이 받은 나라들”이라고 설명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문맹률이 60%인데 반해 말레이시아는 문맹률이 굉장히 낮아 오히려 말레이시아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며 “무슬림들이 더 많고 좋은 교육을 받는 국가들에서는 더 좋은 삶에 대한 해석들이 나올 수 있다”고 전했다.

시린 에바디 변호사는

이란 최초의 여성판사,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역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003년 노벨평화상을 받는 등 세계적 인물로 부상했지만, 정작 그의 조국 이란에서는 여전히 반체제 요주의 인물이자 정권의 눈엣가시다. 그는 평생을 엄청난 용기와 두려움이 수반되는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 뒤에도 에바디의 고난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1947년 이란 북서부 하마단에서 출생했다. 1974년 테헤란대 법과 졸업 후 이란 여성 최초로 법관에 임용돼 테헤란 지방법원장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하다 1979년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 혁명 후 강제퇴직된다. 이슬람 강경파 정권은 “여성은 감정적이므로 법 집행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여성 법관 임용을 금지시켰다. 에바디는 단순 사무직으로 강등됐다. 이때 그는 첫 아이를 유산하는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에바디는 1992년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 법정에서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 원리주의자들의 편파적인 이슬람 법전 해석의 문제점을 짚으며 여성의 이혼, 상속 및 자녀 양육권과 관련된 가족법을 개정하는 데 앞장섰다. 이란에서는 여자가 이혼할 경우 자녀의 양육권은 딸의 경우 2살까지, 아들의 경우는 7살까지만 여성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7살까지 여성이 가진 뒤 법원에서 자녀의 의견을 반영해 누가 양육할 것인지를 판결해준다. 여성이 맡을 경우 남편은 양육비를 줘야 한다.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우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놓는 가슴 아픈 장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하고 있다.

그는 1999년 이란 지식인들에 대한 연쇄 암살의 피해자 가족을 위해 법정투쟁을 벌였고, 수 명의 대학생이 사망한 테헤란대학 경찰 난입사건의 배후를 밝혀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진정한 이슬람 율법은 여성 평등 및 민주주의 가치와 공존한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에 대한 대가는 변호사 자격정지, 거듭되는 투옥 및 수 차례의 암살명단 등재였다. 하지만 그는 여느 반체제 인사들과 달리 이란을 떠나지 않고 약자들의 편에서 투쟁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러고 있다. 그는 “이란의 인권 향상은 외국이나 외부세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란 스스로가 이뤄야 할 문제”라며 자주적 개혁을 주장해 큰 호응을 받았다.

노벨위원회는 2003년 에바디를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변호사·판사·작가·인권운동가로서 분명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혀왔으며 건전한 전문인으로서, 용기 있는 한 인간으로서 어떤 위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는 게 선정 이유였다. 그는 노벨상 시상식에서 이슬람 여성이 착용하는 히잡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이란에서는 법에 따라 히잡을 쓰지만 외국에서는 그 법이 효력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쓸 필요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실은 이슬람 사회의 강제적인 폐쇄성에 대한 항거였다.

에바디는 지뢰반대 운동가 조지 윌리엄스, 케냐의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등 여성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이란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여성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이란의 법 개정에도 힘을 쏟고 있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약자의 인권개선과 세계평화를 향한 그의 열정과 헌신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와 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가 공동 선정한 2006년 ‘세계의 지성 100인’에서 그는 10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