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가까운 친구 김씨가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이유는 그의 대학동창인 이씨를 만났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식자랑으로 열을 올리는데 정말 들어주기가 히들었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아내는 한수 더 떠서 보충설명까지 하고 있었으니 더욱 한심하고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기힘들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3명의 자녀 중 2명이 의사이고 1명이 변호사 또 자식 배우자도 의사, 변호사, 회계사이고, 손자 손녀들도 비싼 사립초등학교에, 자녀들이 사는 집의 큰 규모와 비싼 자동차, 외제가구들과 일하는 도우미, 자녀들의 수입까지도 어마어마한 액수를 대며 세금은 어떻게 피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주위에 있는 친구들의 자녀들과 비교까지 했다고 한다. 자기 자식 자랑을 하는데, 입안 김치가 밖으로 튀어 나와도 의식을 못하고 그 꼴을 보고 듣자니 속에서 열불이 나더라는 것이다.

물론 듣고 있던 김씨는 자기의 자녀들이 그렇지 못한 데서 오는 열등의식이 있을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시기나 질투도 한 몫 했을 수도 있었다. 사실 자식자랑을 한다는 것이 자기를 과시하고 남을 무시하며 스스로 교만해지는데 문제가 더 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자식자랑과 아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 해 태어 날 때부터 제 날수를 다 채우지 못한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내가 아는 장 집사는 자녀 자랑을 가능한 하지 않는다. 누군가 자녀를 칭찬하면 "아이고 모두 옆에서 도와 주셨기 때문이지요. 사실 우리 부부는 이민와서 남편 허 집사와 같이 세탁소를 30여 년 하면서 애들 공부하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어요. 같이 놀아주지도 못했고, 휴가 한 번 못 가고 일에 파묻혀 살았는데 애들이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했지요. 부모로써 생각하면 자녀에게 미안해요. 잘된 것이 있다면 모두 하나님 은혜이고, 또 주위에서 많이 도와주신 덕택입니다"하며 감사를 밖의 분들에게 돌린다. 그 집의 두 자녀는 보기 드물게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 자기 집 옆에서 편안하게 살도록 호수가에 새로 집을 지어 주고 여행은 물론 자동차도 사드리고 애들을 자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재롱 떠는 것을 보이며 외롭지 않게 해준다.

그런데 장 집사 부부가 자녀에게 최고로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 하는 면은 다른데 있다. 물론 공부 잘하고 전문직에서 일하며 효도하는 것을 부모로써 흐뭇하게 여기지만 그것보다는 늘 다른 사람를 도우며 산다는 점이다. 큰아들은 암 전문의사로써 지금도 장애 어린이를 위해 이모저모로 돕고 있고, 50세 전에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 돈이 없어 치료 못받고 그대로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을 위해 일하기로 작정하고 현재 준비하고 있다. 둘째 아들은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다. 그의 박사 논문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도 형처럼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두 자녀는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두 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인색할 정도로 아끼지만 남을 위해서는 재물과 시간을 아낌없이 내놓는 부모를 보고 자랐다. 몇 년 전에도 경기도 여주에 있는 땅 4만평을 아무 조건 없이 모 중고교에 기증했다. 이민생활에서 고생해 모은 돈으로 보람있는 일을 했다. 그런 부모의 삶을 모방하며 살고 있는데 대해 부모로써 흐뭇해 하고 감사한다.

이씨는 자식들이 화려하게 잘사는 것을 자랑하지만 장 집사 부부 경우는 다르다. 자녀가 한인의 위상을 미국 사회에 높이고 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더욱 고맙고 감사하는 일은 사회에 헌신 봉사하는 것을 우선 순위로 꼽는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이 또 있다. 유명한 디자이너 이광희씨가 아프리카 수단에 갔다가 오랜 내전으로 황폐해진 그 곳 참상을 보고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그 가난한 사람을 위해 망고 나무 100 그루를 당장 심어 주었다. 몇 년 후에 그 곳 사람들이 그 열매를 따 먹을 것을 기대하면서. 그 분은 어릴 때 전남 해남에 있는 등대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전쟁고아와 한센병 환자, 부랑아들과 같이 자랐다. 그분의 아버지 이준목 목사와 어머니 김수덕씨가 전쟁터에서 부모 잃고 오갈 곳 없는 고아를 데려다 보살필 때 자신의 자녀도 그 버려진 애들과 같이 자라게 했다는 점이다. 자녀가 그 때는 원망을 많이 했으리라. 그러나 훗 날 이씨가 어른이 돼 부모님의 거룩한 삶을 모방해서 사는 모습이 너무도 내 마음을 울렸다.(중앙일보 2009년 7월18일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참고) 요즈음 장 권사와 이광희씨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고 어두운 세상이 밝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