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잃은 세대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반대로 선택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면, 마음은 무가치한 것을 좇고 결국 자기는 감옥에 갇힙니다. "상실한 마음"에 버려둠을 당합니다. 다양한 죄악을 행하는 타락한 현장에 있게 됩니다. 마음과 생각이 가치 없는 것들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때가 될 때까지 내버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24절부터 28절까지 차례대로 살펴봅시다. 인간의 타락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24절과 28절에 '마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마음과 생각이 다 타락해서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전적인 타락'이라고 합니다.
29-31절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영역들을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타락한 마음이 내리는 결정들은 우리 안에서 출발하여 밖으로 드러납니다. 먼저 죄악의 뿌리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의 네 가지, 곧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함입니다. 죄악을 빨아들이는 것들입니다. 이 뿌리로 부터 물을 공급 받아 줄기가 자랍니다. 죄악의 줄기 부분은 무엇입니까?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5가지 죄악입니다.
그리고 더 죄악의 가지 부분을 자세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12가지 죄악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12가지 목록에 걸리지 않을 사람 있습니까? 나는 몇 개나 걸리는 지 헤아려 보십시오. 제 경우를 말하자면, 어림잡아 다 걸리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살인까지요?"라고 물으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우리 주님은 형제를 미워하면 마음으로 살인한 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미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미움도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의 기준대로 평가해 봅시다. 미움은 마음속의 살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쉽게 혼란에 빠집니다. 이 본문을 우리의 삶에 적용에 해봅시다. 즉 모든 죄악에서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패가 심각해서 믿는 우리 크리스천마저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지 않으면, 쉽게 다시 오염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글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마귀의 똘마니가 사하라 사막을 지나다가 성자가 되기 위해서 고행 길을 떠나는 수도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졸개는 이 수도사를 유혹하여 타락을 시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평온함과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음란의 유혹의 덧을 놓습니다. 탐심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실패해서 더 힘이 센 두목에게 갑니다.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그러자 두목이 “내가 하는 걸 봐” 그러면서 졸개를 데리고 수도사에게 가서 귀에다 대고 몇마다 소곤소곤 댑니다. 그러자 이 수도사의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하면서 격한 감정 속으로 빠져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졸개가 두목에게 묻습니다. “무슨 말을 했기에 저리도 울그락 푸르락 합니까?”그때 마귀 두목이 말하기를 “딱 한마디 속삭여 줬을 뿐인데 그런다.”"그 말이 뭔데요?" "자네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가 되었네." 그 말 한마디에 그만 시기심에 넘어 간 것입니다.
이 죄악은 우리 모두 사소한 것에서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이런 것에서 자동적인 면역 시스템이 작용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동적이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 얻은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자녀다운 삶은 배워갑니다. 배움에는 실패와 실수가 따릅니다. 오염되어서 방황하는 과정도 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 오염을 씻는지를 잘 압니다. 예수님의 피 밖에 업습니다. 모든 일에 나를 부인하고 우리 주님의 피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지금도 역사하는 힘입니다. 나를 다양한 죄악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고 깨끗하게 씻어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적용을 해보면. 우리가 주님의 피로 씻긴 다음에는 그 상태에서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깨끗함 받았다고 그게 다가 아닙니다. 사실은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다시금 더러운 것을 가까이 하면, 계속 더러워집니다. 다음에 할 일은 새로운 습관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사람이 좇았던 생활의 습관들을 과감히 벗고, 새로운 삶의 습관들로 대체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습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습관을 자꾸 벗어 던져 버립시다. 새로운 것을 자꾸 입읍시다. 한 자매가 새롭게 믿게 되었습니다. 옛 습관과 새 습관 사이에서 갈등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신앙의 선배가 와서 묻습니다. "자매님, 지금 어떤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자매가 대답했습니다. "마치 내 안에 잡종견과 혈통 좋은 개가 한 마리씩 있어서 줄곧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개가 이기고 있습니까?" 라고 선배가 물었습니다. 한참 생각을 하더니, "제가 밥을 더 많이 먹인 놈이 이긴 것 같은데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순수 혈통의 개에게 먹이를 많이 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습관에 힘을 실어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맡기십시오.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이 혈통 좋은 개를 힘 있게 만드는 법입니다.
세 번째 적용은. 내가 좋은 습관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채우고 인도하시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뀝니다. 그리스도에게 나를 의탁 하시시고 신뢰하는 자세가 은혜를 구하는 자세입니다. 은혜로만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라는 용어로 설명을 합니다. 어떻게 나날이 내가 거룩해져 갈수 가 있습니까? 성령 충만 받으면 됩니다. 성령충만이라 하니까 마치 빈 독에 물을 채우는 것으로 상상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빈 항아리처럼 되어서 거기다 성령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이미 내주해 계신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고 Control 하시도록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내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나를 변화시키는 힘은 성령의 역사로 오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는 절대 나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것을 알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 받으면 자기 자랑이 없어집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자식 자랑에 거품을 물고 있습니다. “내 아들은 아이비리그를 다니는데, 아 얼마나 애들이 똑똑 한지 몰라요. 우리 아이가 걱정이예요.” 이게 걱정입니까? 자랑입니까? 이런 교회아이들은 고달픕니다. 엄친아~~엄친 딸. 때문에 “아휴 내 팔자야.”하면서 집에 가는 길에 괜히 자기 아이만 쥐어박습니다.
어느 양로원에서 노인들이 모여서 자식 자랑을 합니다. 한 사람이 “우리아들은 지나가면 오~경외하는 추기경님하면서 사람들이 그 손에 입을 맟춘답니다”라고 자랑합니다. 이에 뒤질세라 또 한 노인이 “우리 아들은 지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 한답니다. 그 유명한 연예인이라서” 그때 구석에 앉아있던 얼굴이 험악하게 생겨서 혐오감을 주는 노인이 다가 오면서 말합니다. “우리 아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이 Oh My God! 그러는데.”
우리는 헛된 자랑에 집착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어떤 시도도 또다시 실패할 것입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도, 죄를 씻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미련함과 허무함을 보게 하시려고 우리를 내버려두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패 속에서 주님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허무함 속에서 발견한 축복입니다. 바닥에 내려가서 위를 보고 도움을 요청하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만이 소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매일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더욱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두렵고 떨림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든가 아니면 이런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마음의 찔림과 회개가 없든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직 해답은 한 가지 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죄악을 보고 마음의 찔림과 회개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다면 이 모든 정죄에서 해방되고 거룩을 향해서 우리는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29-31절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영역들을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타락한 마음이 내리는 결정들은 우리 안에서 출발하여 밖으로 드러납니다. 먼저 죄악의 뿌리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의 네 가지, 곧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함입니다. 죄악을 빨아들이는 것들입니다. 이 뿌리로 부터 물을 공급 받아 줄기가 자랍니다. 죄악의 줄기 부분은 무엇입니까?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5가지 죄악입니다.
그리고 더 죄악의 가지 부분을 자세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12가지 죄악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12가지 목록에 걸리지 않을 사람 있습니까? 나는 몇 개나 걸리는 지 헤아려 보십시오. 제 경우를 말하자면, 어림잡아 다 걸리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살인까지요?"라고 물으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우리 주님은 형제를 미워하면 마음으로 살인한 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미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미움도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의 기준대로 평가해 봅시다. 미움은 마음속의 살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쉽게 혼란에 빠집니다. 이 본문을 우리의 삶에 적용에 해봅시다. 즉 모든 죄악에서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패가 심각해서 믿는 우리 크리스천마저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지 않으면, 쉽게 다시 오염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글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마귀의 똘마니가 사하라 사막을 지나다가 성자가 되기 위해서 고행 길을 떠나는 수도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졸개는 이 수도사를 유혹하여 타락을 시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평온함과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음란의 유혹의 덧을 놓습니다. 탐심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실패해서 더 힘이 센 두목에게 갑니다.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그러자 두목이 “내가 하는 걸 봐” 그러면서 졸개를 데리고 수도사에게 가서 귀에다 대고 몇마다 소곤소곤 댑니다. 그러자 이 수도사의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하면서 격한 감정 속으로 빠져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졸개가 두목에게 묻습니다. “무슨 말을 했기에 저리도 울그락 푸르락 합니까?”그때 마귀 두목이 말하기를 “딱 한마디 속삭여 줬을 뿐인데 그런다.”"그 말이 뭔데요?" "자네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가 되었네." 그 말 한마디에 그만 시기심에 넘어 간 것입니다.
이 죄악은 우리 모두 사소한 것에서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이런 것에서 자동적인 면역 시스템이 작용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동적이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 얻은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자녀다운 삶은 배워갑니다. 배움에는 실패와 실수가 따릅니다. 오염되어서 방황하는 과정도 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 오염을 씻는지를 잘 압니다. 예수님의 피 밖에 업습니다. 모든 일에 나를 부인하고 우리 주님의 피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지금도 역사하는 힘입니다. 나를 다양한 죄악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고 깨끗하게 씻어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적용을 해보면. 우리가 주님의 피로 씻긴 다음에는 그 상태에서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깨끗함 받았다고 그게 다가 아닙니다. 사실은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다시금 더러운 것을 가까이 하면, 계속 더러워집니다. 다음에 할 일은 새로운 습관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사람이 좇았던 생활의 습관들을 과감히 벗고, 새로운 삶의 습관들로 대체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습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습관을 자꾸 벗어 던져 버립시다. 새로운 것을 자꾸 입읍시다. 한 자매가 새롭게 믿게 되었습니다. 옛 습관과 새 습관 사이에서 갈등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신앙의 선배가 와서 묻습니다. "자매님, 지금 어떤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자매가 대답했습니다. "마치 내 안에 잡종견과 혈통 좋은 개가 한 마리씩 있어서 줄곧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개가 이기고 있습니까?" 라고 선배가 물었습니다. 한참 생각을 하더니, "제가 밥을 더 많이 먹인 놈이 이긴 것 같은데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순수 혈통의 개에게 먹이를 많이 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습관에 힘을 실어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맡기십시오.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이 혈통 좋은 개를 힘 있게 만드는 법입니다.
세 번째 적용은. 내가 좋은 습관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채우고 인도하시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뀝니다. 그리스도에게 나를 의탁 하시시고 신뢰하는 자세가 은혜를 구하는 자세입니다. 은혜로만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라는 용어로 설명을 합니다. 어떻게 나날이 내가 거룩해져 갈수 가 있습니까? 성령 충만 받으면 됩니다. 성령충만이라 하니까 마치 빈 독에 물을 채우는 것으로 상상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빈 항아리처럼 되어서 거기다 성령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이미 내주해 계신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고 Control 하시도록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내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나를 변화시키는 힘은 성령의 역사로 오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는 절대 나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것을 알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 받으면 자기 자랑이 없어집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자식 자랑에 거품을 물고 있습니다. “내 아들은 아이비리그를 다니는데, 아 얼마나 애들이 똑똑 한지 몰라요. 우리 아이가 걱정이예요.” 이게 걱정입니까? 자랑입니까? 이런 교회아이들은 고달픕니다. 엄친아~~엄친 딸. 때문에 “아휴 내 팔자야.”하면서 집에 가는 길에 괜히 자기 아이만 쥐어박습니다.
어느 양로원에서 노인들이 모여서 자식 자랑을 합니다. 한 사람이 “우리아들은 지나가면 오~경외하는 추기경님하면서 사람들이 그 손에 입을 맟춘답니다”라고 자랑합니다. 이에 뒤질세라 또 한 노인이 “우리 아들은 지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 한답니다. 그 유명한 연예인이라서” 그때 구석에 앉아있던 얼굴이 험악하게 생겨서 혐오감을 주는 노인이 다가 오면서 말합니다. “우리 아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이 Oh My God! 그러는데.”
우리는 헛된 자랑에 집착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어떤 시도도 또다시 실패할 것입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도, 죄를 씻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미련함과 허무함을 보게 하시려고 우리를 내버려두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패 속에서 주님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허무함 속에서 발견한 축복입니다. 바닥에 내려가서 위를 보고 도움을 요청하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만이 소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매일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더욱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두렵고 떨림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든가 아니면 이런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마음의 찔림과 회개가 없든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직 해답은 한 가지 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죄악을 보고 마음의 찔림과 회개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다면 이 모든 정죄에서 해방되고 거룩을 향해서 우리는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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