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연대기-를 쓴 시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가 원했던 자유를 누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두려운 자유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하나님께 "제발, 내 맘대로 하게 내버려두세요!" 라고 말하고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멀리 떠난 인간은 자유를 얻은듯하여 좋아서 날뛰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구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돌고 돌았지만,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방황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해서 떠난 인간은 스스로에게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란 이런 것이 아닙니까?
내가 인생의 주인이라면, 결국 모든 것은 혼란스러워집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나를 생각해봅시다. 무작정 달려왔거나,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방향키를 잡고 멋지게 성공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낍니다. 인생의 주인이 나였을 때, 나는 나의 철학과 나의 결정과 나의 기준으로 살았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어떤 것이라도 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빈껍데기라는 것을 알 때까지 그렇게 걸었습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다 보니, 나는 두렵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목적이라고 해봐야 이 세상의 것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허기지고 더 허전 합니다. 결국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걷는 모습과 도착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살았던 나는 어떤 인간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없는 인간은 우상숭배로 허무한데 종노릇 하며 삽니다 (24-25).
우상숭배의 근본은 끝없는 이기심과 욕망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선택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욕망은 죄를 낳습니다. 24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은 온갖 욕망의 열매를 먹고 삽니다. 욕망의 열매 중에 제일 쉽게 드러나는 것은 성적인 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십시오. 제일 눈에 띠게 혼란스러운 부분이 무엇입니까? 성적인 문란함 아닙니까? 우리는 요즘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혼전 성경험, 혼외정사, 스와핑 등 온갖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단어들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립니다.
인터넷을 하다 보면 쉽게 볼 수 있는 광고는 성의 방종과 유혹적인 것들 입니다. 쉽게 사고파는 성에 관한 광고물들입니다. 눈으로 귀로 죄를 짓게 합니다. 인간이 허무할수록 더욱 이런 일에 집착할 것입니다.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의 성적인 만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관습에 얽매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하였고, 지금은 그것을 드러내 놓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입니다.
요즘에 부모와 자식 간에 새로운 전쟁이 있습니다. 그 전쟁은 인터넷을 통한 컴퓨터 오락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아이들은 10분이라도 오락을 더 하려고 합니다. 컴퓨터 오락을 즐기는 데, 1분 가지고 싸웁니다. 시간이 지났다, 안 지났다 하고 싸웁니다. 전쟁입니다. 물론 건전한 오락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좋아하는 오락을 살펴보면, 사람을 자극하는 오락이 대부분입니다. 생명을 중시하지 않는 전쟁 오락, 여자의 몸을 흥미로운 수단으로 사용하는 오락, 폭력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오락이 숫하게 깔려 있습니다. 이런 게임을 통해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요? 전략을 배웁니까? 머리 쓰는 법을 배웁니까? 그런 것을 배우기는 하지만, 다른 면에서 너무나 나쁜 대가를 지불하고 배웁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것을 배웁니다. 성적인 자극에 쉽게 노출됩니다. 폭력을 다반사로 압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녀는 기준을 알지 못하고 삽니다. 기준이라도 알면 갈등하게 되고 이기려고 노력도 합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면, 자기의 인격, 정신세계,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그 대가가 너무 커서 인생을 다 허비하고 난 다음에 겨우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깨닫고 돌아오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돌아온 주님 옆에 있던 강도처럼, 돌아올 수만 있다면 돌아오는 것이 축복입니다. 버려두신 목적을 깨닫고 돌아오는 사람이 복됩니다. 버려두심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내가 허무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내 삶에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고 나니, 욕망이란 우상이 얼마나 강하게 나를 얽어매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깨달아 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 없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다가도, 금세 깨닫습니다. "내 욕심대로 하면, 결국은 혼란뿐이야!"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다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결정하지 말자. 하나님을 떠나서 내 계획을 세우지 말자. 저는 점점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내 욕심대로 행하던 생활이 오히려 덫이었음을 절실히 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은 여전히 하나님을 떠난 자기 욕심을 만족시키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상숭배가 나를 높이는 것이라면, 하나님 숭배는 하나님을 높이고 남을 돌아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24-25절에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이 자기마음대로 하고 싶은 영역 중에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역은 성적인 영역입니다. 자기 몸을 가지고 자기의 소유와 관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감옥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26-27절은 성적인 타락의 단적인 예인 동성연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버려두신 감옥에서 자기의 욕심을 따라 동성연애를 탐닉했습니다. 26절에 "부끄러운 욕심"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낱말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태까지 나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시도한 것 중에 눈에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은 질서를 어지럽힌 상태에서 자기 몸을 탐닉하는 것입니다. 동성연애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는 분명한 죄입니다.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따라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동성애에 빠져 있다가 진리를 접한 사람은 마음이 죄책감으로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리적인 불안함이 찾아옵니다. 심지어 동성애는 몸에 에이즈와 같은 질병이 발병할 확률을 높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동성연애가 어디까지 왔습니까?
동성연애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은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고리타분한 옛날 윤리의식이라고 합니다. 개인 고유의 영역이라고 강변합니다. 놀라운 것은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에 관대해지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서클활동을 허용하고 있는 대학도 있습니다. 이미 미국 일부 교단에서는 동성애를 하고 있는 목회자가 목회를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성적인 타락만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타락한 증상들을 보입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28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21가지 죄들을 짓게”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신 것이 심판입니다. 저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 두고,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고,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간의 죄의 본성대로 내어 버려두시는지 아십니까?
28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은 참으로 비참한 것입니다. 그것은 추악하고 참혹한 죄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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