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백산 비로봉이 멀리 보이는 산골에서 고3 때 까지 나뭇지개를 지고 살았다.내 친구들은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하고 모두 농사짓든지 도회지로 떠났다. 나도 형편이 나은게 없었지만 아버님의 무서운 결심 때문에 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나의 아버님은 학교를 다닌적이 없으셨고 문맹이셨다. 그래서 우체부가 어쩌다가 편지를 들고 오면 나보고 읽어 보라고하셨던 기억이난다.

나의 아버지는 큰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의 학교 뒷바라지 하시느라 농사만 지으셨는데 당신의 큰 아들이 공부를 좀 한다하니까 이놈은 대학을 보내야겠다는 독한 결심을 하신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버님은 밤낮으로 일하셔서 저축을 하셨다. 그덕에 오남매의 장남인 나도 아버님의 농사일을 도와 밤낮으로 일한 기억밖에 없다. 여름방학에는 논 밭에서 허리가 빠지도록 일하고 겨울 방학 때는 1년 땔감을 장만하기 위해 소달구지 몰고 새벽별 보면서 떠나서 저녁 별이 떠야 돌아오곤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겨울, 새벽 같이 소달구지 몰고 더 깊은 큰산으로 떠나기전에 나는 아버님 보다 더 일찍 일어나 산넘에 이웃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교회 새벽기도를 다녀오곤했다.비록 나뭇꾼이지만 새벽종을 땡그렁 땡그렁 치면서 기도했다. 아버님소원대로 읍내에 있는 모교의 교사가 되고 이 시골교회 장로가 되어

평생 새벽종치는 종직이로 살게해 달라고. 그해 어느 겨울날 새벽에도 새벽기도 갈려고 뽀시락 뽀시락 거렸더니 옆에 주무시던 아버님께서 헛기침을 하시면서 오늘은 가지 말라고하셨다. 그러나 조금 지나니 아버님께서 다시 코를고시는게 아닌가.

살금살금 일어나 마당을 보니 밤새 눈이 내리다가 새벽녁에는 비가 내려서 질퍽거렸다. 운동화를 신고 갈려고하니 운동화가 젖으면 아침에 학교갈 때 곤란할것 같아서 그냥 맨발로 걸어갔다. 공동묘지를 돌아 산넘어에 있는 교회에 가니 할머님들이 맨발로 눈길을 걸어 새벽기도 나온 어린 나를 안아주시면서 너는 커서 목사가 될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날 이후 나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제삿날만 되면 제사 안지낸다고 불편해하시면서 교회가는 것을 막으시던 아버님께서 그날 이후로는 제사 지내는 방에는 오되 우리는 절할테니까 너는 서서 기도하라고하셨다. 나는 그 때 아버님의 그마음를 몰랐었다. 그러나 41년이 지나 돌아보니 맨발로 새벽눈길을 걸어간 큰 아들의 발자욱이 눈에 밟히셔서 그러셨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께서는 나를 아버님의 소원인 고향의 학교교사로 세우지 않으시고, 교회 할머님의 기도를 받으시어 나를 잘못 보시고 목사가 되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내성적이고 말없는 소년으로 자라난 나를 소백산 산골교회 새벽종직이로 쓰시다가 끄집어 내시어 온세계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하나님 마음대로 사용하셨다. 잃어버린 영혼구원해 제자삼는 그 고귀한 사역에 말이다. 나는 빚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