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특징 짓는 가장 중요한 낱말 하나를 고르라면 선뜻 은혜를 선택해야 한다. 은혜가 아니었던들 어찌 오늘의 내가 가능 했겠는가. 은혜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분의 사랑 안에 살게 되었겠는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고전 15:10)" 이라는 고백은 바울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은혜에 기댄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좀처럼 은혜가 우세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은혜 받은 자만이 살아낼 수 있는 은혜 베푸는 삶이어야 하는데 도무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는 받는 것이지 주는 것이 아니다. 은혜라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한량 없는 호의를 떠올릴 뿐,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것 없이 거저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 은혜에 젖어 있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 자기도 모르게 적용하는 원칙은 놀랍게도 은혜 받지 못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받은 대로 돌려 주는 것이다.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려 한다.

은혜는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상대가 내게 어떻게 하든 나는 그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이다. 이해득실을 따지자면, 손해 보는 것이다. 우리 귀에 익은 말로 하자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양방향의 은혜가 풍성한 사람이다. 들어오는 은혜와 나가는 은혜가 늘 넉넉하다. 받은 은혜가 많아서 주는 은혜가 아깝지 않다.

은혜에 터를 둔 기독교 신앙에 수 십 년 발 딛고 살면서도 받는 은혜에 생각이 갇혀 있는 한은 우리 신앙의 진보를 기대하기가 퍽 어려울 것이다. 그 점을 해결하지 못하면 신앙한 햇수에 관계 없이 우리는 끝끝내 초보 신앙을 면하지 못하고 당당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서울에 있는 선교단체를 방문하여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어느 선교사님께 들은 이야기이다. 5와 4.5가 있었단다. 불과 0.5 차이였지만 4.5는 그 작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5에 눌려 지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5가 4.5에게 물 심부름을 시켰더니, 4.5가 5에게 “네가 떠다 먹으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5가 너무 놀라서 “너 왜 이래?” 물었더니 4.5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하더란다. “나, 점 뺐어.”

은혜라고 하면 받는 은혜만 생각하고 베풀고 주는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는 그 고약한 점을 해결하자. 그래서 열 배나 더 막강한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