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아버지의 설 자리가 없는 시대가 없었다. 미국이 물질적으로는 세계의 일등 국가라고 하지만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등급이 뚝 떨어진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부모가 동의 하지 않으면 부모의 코밑에까지 손가락을 대고 악을 쓰며 소리 지르고 문을 박 차고 나가는 망나니 아들 딸, 엄마 아빠는 큰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속상해 하는 모습을 TV에서 자주 본다.
한국도 선진국 문턱을 넘으면서 오랜 전통인 순종과 아버지와 자녀간의 끈끈한 정과 사랑이 차츰 변질 되어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선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잘 났으나 못 났으나 아버지는 그 집의 가장이고 어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위계질서가 잡혀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세대의 생각은 좀 달라진 것 같다. 왕자 공주처럼 키운 세대에는 말이다.
한 남자와 여자가 자기의 행복을 위해 가정을 이루고 또 사랑의 열매로 자녀가 생겼다. 여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한 공동체다. 부모는 자녀를 키울 의무와 책임이 있고 자녀는 부모로부터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당당함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차이보다는 가정에 대한 개념의 차이다.
오랫동안 베스트 쎌러 였던 김정현의 "아버지" 라는 책에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사랑하는 딸로부터 독이 가득 찬 편지를 받는다. 아빠를 당신이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 원망과 저주가 넘치는 길고 긴 편지를 받고 강도에게 비수를 맞은 것 이상으로 온 몸에 전율을 느끼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아빠는 그 딸을 계속 사랑한다. 또한 조 창인의 "가시고기"라는 책에서는 아버지의 삶을 잘 그렸다. 가시고기 암컷이 쏟아 놓고 가버린 알들을 수컷은 죽을 똥을 싸면서도 밤낮 그 알들을 지킨다. 크고 힘 센 고기가 옆에 오기만 해도 용감하게 달려들어 쫓아내면서 그 알이 부화되어 한 생명체로 제 살길을 찾아 나설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그 수컷은 모든 에너지를 탕진하고 살아갈 기력이 없어서 결국 소리없이 한 구석에서 쓸쓸히 죽는다. 이것이 보통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그는 사회에 호소한다. 오늘날 핵 가족 시대가 되면서 "아빠 말 들어!"가 안 통한다. 차라리 "엄마 말 들어"가 좀 통한다. 외부에서부터 오는 어떤 힘이 아니라 가정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다. 애들이 부모 중에서도 엄마를 먼저 부르고 다음이 아빠다. 글을 쓸 때도 'mom and dad' 이다. 부모간에 다툼이 생기면 애들은 무조건 엄마 편이다. 그러기에 애들 앞에서는 부부 싸움을 안하는 것이 지혜로운 아빠다. 나이가 들수록 설 자리가 더 좁아진다. 오죽하면 이런 이야기가 정설처럼 될까?! 아내가 국을 많이 끓이면 남편은 눈치챈다. 먼 여행을 떠나려고 미리 국을 끓여 놓는다는 것을. 얼마나 있다 오는지, 누구하고 가는지,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다가는 불 벼락을 맞는다. 국이라도 끓여 놓고 가는 것을 감지덕지 해야 지. 또 있다. 이사 갈 때는 남편이 먼저 차에 올라탄다고, 자기를 버리고 갈까 봐.
얼마 전 타임지에 미국 대통령 보다 더 영향력을 발휘하는 빌리 그래함 목사와 그의 아들 프링틀린 크래함 이야기가 크게 실렸다. 제목은 "돌아온 탕자"(the prodigal son)이다. 세상에 알다가도 모를 일은 그렇게 훌륭한 목사의 아들이 탕자가 되다니. 프랭클린은 열두 살부터 스무 두살 까지 방탕아로 살았다. 독한 술을 마시고 총 쏘는 것을 즐기고 오토바이 폭주족에 속해 나쁜 일들을 골라서 많이 했다. 그가 22살 되던 날 아빠는 아들을 앉히고 "얘야, 엄마 아빠는 너를 향한 기도를 쉬지 않는다. 이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와야 되지 않겠니? 네가 언제 돌아오든지 하나님은 너를 용서한단다. 또 엄마 아빠도 네가 언제 돌아오든지 너를 기쁨으로 맞이해 줄 것이다". 아들 왈, "아빠 그 지겨운 얘기는 그만하세요" 하고 문을 박 차고 나가 비행기 타고 멀리 갔다. 그 날 밤 호텔에서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던 아들은 등불 밑에 있는 성경을 보다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라는 말씀에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곧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제는 아버지의 후계자로 세계를 누비며 큰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내용이다.
어찌해서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 망나니 자녀와의 사랑의 끈을 놓지 못할까?! 오히려 저렇게 된 것은 내가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기 때문 이라고 스스로 죄인이 될까? 더 묘한 것은 그 못된 탕자가 언제인가 부모의 기도와 눈물이 섞인 사랑을 깨닫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아버지들이여 힘내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부모가 동의 하지 않으면 부모의 코밑에까지 손가락을 대고 악을 쓰며 소리 지르고 문을 박 차고 나가는 망나니 아들 딸, 엄마 아빠는 큰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속상해 하는 모습을 TV에서 자주 본다.
한국도 선진국 문턱을 넘으면서 오랜 전통인 순종과 아버지와 자녀간의 끈끈한 정과 사랑이 차츰 변질 되어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선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잘 났으나 못 났으나 아버지는 그 집의 가장이고 어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위계질서가 잡혀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세대의 생각은 좀 달라진 것 같다. 왕자 공주처럼 키운 세대에는 말이다.
한 남자와 여자가 자기의 행복을 위해 가정을 이루고 또 사랑의 열매로 자녀가 생겼다. 여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한 공동체다. 부모는 자녀를 키울 의무와 책임이 있고 자녀는 부모로부터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당당함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차이보다는 가정에 대한 개념의 차이다.
오랫동안 베스트 쎌러 였던 김정현의 "아버지" 라는 책에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사랑하는 딸로부터 독이 가득 찬 편지를 받는다. 아빠를 당신이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 원망과 저주가 넘치는 길고 긴 편지를 받고 강도에게 비수를 맞은 것 이상으로 온 몸에 전율을 느끼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아빠는 그 딸을 계속 사랑한다. 또한 조 창인의 "가시고기"라는 책에서는 아버지의 삶을 잘 그렸다. 가시고기 암컷이 쏟아 놓고 가버린 알들을 수컷은 죽을 똥을 싸면서도 밤낮 그 알들을 지킨다. 크고 힘 센 고기가 옆에 오기만 해도 용감하게 달려들어 쫓아내면서 그 알이 부화되어 한 생명체로 제 살길을 찾아 나설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그 수컷은 모든 에너지를 탕진하고 살아갈 기력이 없어서 결국 소리없이 한 구석에서 쓸쓸히 죽는다. 이것이 보통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그는 사회에 호소한다. 오늘날 핵 가족 시대가 되면서 "아빠 말 들어!"가 안 통한다. 차라리 "엄마 말 들어"가 좀 통한다. 외부에서부터 오는 어떤 힘이 아니라 가정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다. 애들이 부모 중에서도 엄마를 먼저 부르고 다음이 아빠다. 글을 쓸 때도 'mom and dad' 이다. 부모간에 다툼이 생기면 애들은 무조건 엄마 편이다. 그러기에 애들 앞에서는 부부 싸움을 안하는 것이 지혜로운 아빠다. 나이가 들수록 설 자리가 더 좁아진다. 오죽하면 이런 이야기가 정설처럼 될까?! 아내가 국을 많이 끓이면 남편은 눈치챈다. 먼 여행을 떠나려고 미리 국을 끓여 놓는다는 것을. 얼마나 있다 오는지, 누구하고 가는지,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다가는 불 벼락을 맞는다. 국이라도 끓여 놓고 가는 것을 감지덕지 해야 지. 또 있다. 이사 갈 때는 남편이 먼저 차에 올라탄다고, 자기를 버리고 갈까 봐.
얼마 전 타임지에 미국 대통령 보다 더 영향력을 발휘하는 빌리 그래함 목사와 그의 아들 프링틀린 크래함 이야기가 크게 실렸다. 제목은 "돌아온 탕자"(the prodigal son)이다. 세상에 알다가도 모를 일은 그렇게 훌륭한 목사의 아들이 탕자가 되다니. 프랭클린은 열두 살부터 스무 두살 까지 방탕아로 살았다. 독한 술을 마시고 총 쏘는 것을 즐기고 오토바이 폭주족에 속해 나쁜 일들을 골라서 많이 했다. 그가 22살 되던 날 아빠는 아들을 앉히고 "얘야, 엄마 아빠는 너를 향한 기도를 쉬지 않는다. 이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와야 되지 않겠니? 네가 언제 돌아오든지 하나님은 너를 용서한단다. 또 엄마 아빠도 네가 언제 돌아오든지 너를 기쁨으로 맞이해 줄 것이다". 아들 왈, "아빠 그 지겨운 얘기는 그만하세요" 하고 문을 박 차고 나가 비행기 타고 멀리 갔다. 그 날 밤 호텔에서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던 아들은 등불 밑에 있는 성경을 보다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라는 말씀에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곧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제는 아버지의 후계자로 세계를 누비며 큰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내용이다.
어찌해서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 망나니 자녀와의 사랑의 끈을 놓지 못할까?! 오히려 저렇게 된 것은 내가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기 때문 이라고 스스로 죄인이 될까? 더 묘한 것은 그 못된 탕자가 언제인가 부모의 기도와 눈물이 섞인 사랑을 깨닫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아버지들이여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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