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 미지야! 어느 아버지가 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단다. “아빠는 가빈이를 사랑한단다. 사실은 아빠가 엄마보다 많이 사랑한단다. 굳이 수량으로 표현을 하자면, 열 배정도 더 많이 사랑한단다. 엄마의 사랑은 아빠의 사랑에 비교하면 아주 형편이 없는 수준이란다.그러니 엄마의 가식적인 사랑에 속지 말고, 현명하게 대처 할 수 있는 현명한 가빈이가 되었으면 한다. 운 운”

실소를 금할 길 없는 유치한 글이지만 속으로는 '나도!‘라는 울림이 나오는 것은 어찜인지 모르겠다. 네가 서울 영천의 박도순 산부인과에서 고고의 울음소리를 내고 세상에 나오던 날 아빠는 벌써 이 예쁜 딸을 누구에게 주나 슬며시 걱정했는데 너는 나풀나풀 거리며 잘도 내 곁을 떠났다. 울먹거리는 아빠의 내색도 살피지 않고 말이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말만한 처녀가 되어서도 서슴치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아빠 엄마 가운데를 헤집고 들어와 종알거리던 내 딸이 맞는가 진정 속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너는 언제나 나의 기쁨이다. 내 기억의 영상에는 아직 홍제동 집 그네에 매달려 사내아이처럼 하 하 웃고 발 구름하면서 높이 날아오르거나, 고덕 제일 초등학교에서 화관무를 추던 네가 날 보고 족두리를 떨어뜨리며 달려오고 있다.

내성적인 오빠보다 더 씩씩한 너를 할아버지는 귀여워 어쩔 줄 모르셨지! 신세계 백화점 식당가에 토요일마다 불러내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고 철철이 옷가지와 장난감을 사주시던 네 할아버지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6년이나 되었구나! 영어 철자도 모르고 이민와서 많이도 울었지, 아직 풀지 못한 이삿짐 박스에 한 단어를 수백번씩 쓴 네 끈기를 뒤늦게 알고 아빠는 놀라고 또 자랑스러웠다. 네가 몽고메리카운티 고등학교 아시안 클럽 회장을 하면서 야외 소풍이며 농구대회, 여름 댄스파티 등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것을 볼 때 한 인물 났다고 아빠가 얼마나 으시댔는지 너는 모를게다.

목회의 환란가운데서도 언제나 너는 긍정적으로 나를 격려하였지. 교회 학교에서 맏언니 겸 교사 역을 톡톡히 잘해 어른들의 이쁨을 독차지 하던 너였다. 네 친구들이 무리해서 집 떠나 대학 진학을 할 때도 너는 집에서 다닐 수 있는 주립 대학을 다니면서 오빠와 같이 알바를 억척스럽게 하면서도 언제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서 내 근심을 덜어 주었다.

졸업후에도 한국에 가서 6개월 쉰 것 외에는 직장 생활을 순조롭게 하니 이 아니 기쁨이냐! 모두다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네가 엄마의 근면한 성품을 그대로 닮음이다. 오빠 내외가 원거리를 이유로 아버지 교회를 출석하지 못함에도 너희 부부는 열심히 아빠를 돕는 동역자로서 책임을 다했다.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네가 아버지 교회를 도와 하나님의 축복을 더 받는다고 네 엄마에게 간증했다니 정말 감격하고 하나님앞에 감사 할 따름이다.

이제 외손만 본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부디 건강하고 이제껏 그래왔듯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 가족중심 이웃중심해서 살고 수족지애(手足之愛)라고 하나 밖에 없는 오빠네와 사랑하면서 도우면서 그렇게 오순도순 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복이 5월 가정의 달에 충만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