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이 주 안에서 믿음을 지키며 항상 감사하면서 살았던 것 같이 우리도 주 안에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항상 감사하며 살 때 승리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2월 옥민권 목사는 27년간 담임목사로 재직한 올림피아장로교회에서 은퇴예배를 드렸다. 포틀랜드 한인교회, 타코마 중앙교회, 타코마 한인연합 장로교회에서 사역한 시간까지 합하면 30여 년 간을 이곳 서북미지역을 섬겨왔다. 최근 서북미목회연구원에서 만난 그는 “목회는 끝났다는 것보다 주신 사명을 이루는 과정”이라며 “자신의 할 일이 남아있는 한 주의 일에 충성스럽게 일하겠다”고 말했다.
이력에 기재되는 항목이 짧을수록 그 사람의 성실성이 돋보이고, 복잡할수록 다양성이 돋보이는 성향을 가졌다고 한다. 서북미를 벗어나지 않고 오로지 목회에만 전면했던 옥 목사는 30년의 목회 인생동안 교회와 교인들에게 충성스런 목회자였다.
옥 목사는 1943년 평안남도의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가 김지학 목사이며 아버지가 옥병호 목사다. 그는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다섯살 때 했을 정도로 절처한 기독교 가정에서 신앙을 전수 받았다.
“주님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섬기시는 부모님을 통해 어려서 부터 하나님께서는 제게도 목회자의 꿈을 주셨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을 진남포에서 다니다가 1.4 후퇴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했습니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서울까지 보름이나 걸어서 왔습니다. 남한으로 피난 나와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목사가 되기 원하는 꿈은 변함이 없었고,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하여 항상 기도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피난 생활의 어려움과 괴로움 중에서도 우리 가족은 아침마다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찬송을 부르면서 모든 근심과 염려를 주님께 맡기니 마음에 평안과 감사가 넘침을 체험하면서 자랐습니다.”
목회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학교 부터는 기독교 학교를 다녔다. 숭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것이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교단 분열과 다툼을 보며 미국에서의 목회를 다짐하게 되었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수학했던 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에진학하게 된다. Western Evangelical Seminary에서 M.A. in Theology 학위를 받고,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는다.
옥 목사는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어려서 부터 약했던 심장을 수술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인해 몸의 왼쪽에 완전 마비가 왔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목사가 되어 섬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고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병원 침대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목숨을 연장시켜 주셔서 목사가 되게 하시면 한해 만이라도, 아니 한달 만이라도, 그렇게도 아니하시려먼, 단 하루만이라도 목사로 섬기다가 주님께 가겠다고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옥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그때부터 회복이 시작되었고 목사 안수도 받게 되었고 지난 30년을 하나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겼다고 회고한다. 그가 평생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온 것은 바로 ‘전도’와‘화목’의 목회였다. 목사의 할일은 전도라고 생각했고 교파나 교단이 달라도 주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다툴 시간조차 아깝다는 것이다.
가장 보람됐던 일은 무엇인가?
목사로서 가장 보람됐던 일은 무엇보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예수님 잘 믿고 신앙생활 잘하면서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 입니다. 전도를 하면 부모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자녀가 성장하고 기뻐하면 내가 기쁜것 처럼 전도한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기뻐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목회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교인 모두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식사 할때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만 먹을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특히 이 부분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와 맞는 교인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을 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사랑을 나눌 때 목회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또 전도하고 나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전도할 때 내 교인을 만들면 안됩니다. 내 교인은 없습니다. 전도하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게 중요합니다. 내 교인을 만드는 순간 전도자나 성도 모두 각자의 자리를 벗어나 교회 생활을 하기 힘들어집니다.
27년 전 12명의 성도와 함께 올리피아장로교회를 개척하면서 직접 노방전도를 했다고 들었다. 전도의 비결이 있다면
목사라도 처음에 전도를 하려고 하면 두려움이 따름니다. 저 사람이 싫다고 하거나 나에게 거친 말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목사니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됩니다. 나의 사명을 생각하면 내가 할 일을 알게 됩니다. 그저 목사는 복음 전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게 목사가 할 일이고 그 일을 하면 됩니다.
지역 목회자들로 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쎄요. 사람을 대할 때 벽을 두지 않습니다. 교단이나 교파가 달라도 부담이 없이 가까이 대하니까 주변 분들도 저를 편하게 대해주는 것 같고 제가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이야기도 자주하고 모든 사람들과 두루 친해서 저를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웃음)
이민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민자들의 삶은 고단합니다. 위로와 보호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모가 필요하듯 이민자들에게는 영적인 부모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발견하면 이민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더 나아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은퇴를 했지만 목회를 끝냈다는 것보다는 주신 사명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해왔던 성경공부는 계속할 것입니다. 또 둥지선교회 서북미목회연구원 사역도 꾸준히 이어나가겠습니다.
누군가 얼굴은 앞모습이 아름다워야 하지만 인생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다. 전도와 헌신보다 분열이 화제가 되는 요즘 옥민권 목사는 후임목회자도 결정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용퇴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그는 외유내강의 목회자로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 뒤에 앞으로도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숨어있다.
지난 2월 옥민권 목사는 27년간 담임목사로 재직한 올림피아장로교회에서 은퇴예배를 드렸다. 포틀랜드 한인교회, 타코마 중앙교회, 타코마 한인연합 장로교회에서 사역한 시간까지 합하면 30여 년 간을 이곳 서북미지역을 섬겨왔다. 최근 서북미목회연구원에서 만난 그는 “목회는 끝났다는 것보다 주신 사명을 이루는 과정”이라며 “자신의 할 일이 남아있는 한 주의 일에 충성스럽게 일하겠다”고 말했다.
이력에 기재되는 항목이 짧을수록 그 사람의 성실성이 돋보이고, 복잡할수록 다양성이 돋보이는 성향을 가졌다고 한다. 서북미를 벗어나지 않고 오로지 목회에만 전면했던 옥 목사는 30년의 목회 인생동안 교회와 교인들에게 충성스런 목회자였다.
옥 목사는 1943년 평안남도의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가 김지학 목사이며 아버지가 옥병호 목사다. 그는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다섯살 때 했을 정도로 절처한 기독교 가정에서 신앙을 전수 받았다.
“주님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섬기시는 부모님을 통해 어려서 부터 하나님께서는 제게도 목회자의 꿈을 주셨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을 진남포에서 다니다가 1.4 후퇴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했습니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서울까지 보름이나 걸어서 왔습니다. 남한으로 피난 나와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목사가 되기 원하는 꿈은 변함이 없었고,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하여 항상 기도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피난 생활의 어려움과 괴로움 중에서도 우리 가족은 아침마다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찬송을 부르면서 모든 근심과 염려를 주님께 맡기니 마음에 평안과 감사가 넘침을 체험하면서 자랐습니다.”
목회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학교 부터는 기독교 학교를 다녔다. 숭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것이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교단 분열과 다툼을 보며 미국에서의 목회를 다짐하게 되었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수학했던 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에진학하게 된다. Western Evangelical Seminary에서 M.A. in Theology 학위를 받고,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는다.
옥 목사는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어려서 부터 약했던 심장을 수술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인해 몸의 왼쪽에 완전 마비가 왔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목사가 되어 섬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고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병원 침대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목숨을 연장시켜 주셔서 목사가 되게 하시면 한해 만이라도, 아니 한달 만이라도, 그렇게도 아니하시려먼, 단 하루만이라도 목사로 섬기다가 주님께 가겠다고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옥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그때부터 회복이 시작되었고 목사 안수도 받게 되었고 지난 30년을 하나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겼다고 회고한다. 그가 평생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온 것은 바로 ‘전도’와‘화목’의 목회였다. 목사의 할일은 전도라고 생각했고 교파나 교단이 달라도 주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다툴 시간조차 아깝다는 것이다.
가장 보람됐던 일은 무엇인가?
목사로서 가장 보람됐던 일은 무엇보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예수님 잘 믿고 신앙생활 잘하면서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 입니다. 전도를 하면 부모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자녀가 성장하고 기뻐하면 내가 기쁜것 처럼 전도한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기뻐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목회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교인 모두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식사 할때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만 먹을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특히 이 부분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와 맞는 교인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을 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사랑을 나눌 때 목회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또 전도하고 나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전도할 때 내 교인을 만들면 안됩니다. 내 교인은 없습니다. 전도하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게 중요합니다. 내 교인을 만드는 순간 전도자나 성도 모두 각자의 자리를 벗어나 교회 생활을 하기 힘들어집니다.
27년 전 12명의 성도와 함께 올리피아장로교회를 개척하면서 직접 노방전도를 했다고 들었다. 전도의 비결이 있다면
목사라도 처음에 전도를 하려고 하면 두려움이 따름니다. 저 사람이 싫다고 하거나 나에게 거친 말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목사니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됩니다. 나의 사명을 생각하면 내가 할 일을 알게 됩니다. 그저 목사는 복음 전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게 목사가 할 일이고 그 일을 하면 됩니다.
지역 목회자들로 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쎄요. 사람을 대할 때 벽을 두지 않습니다. 교단이나 교파가 달라도 부담이 없이 가까이 대하니까 주변 분들도 저를 편하게 대해주는 것 같고 제가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이야기도 자주하고 모든 사람들과 두루 친해서 저를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웃음)
이민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민자들의 삶은 고단합니다. 위로와 보호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모가 필요하듯 이민자들에게는 영적인 부모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발견하면 이민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더 나아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은퇴를 했지만 목회를 끝냈다는 것보다는 주신 사명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해왔던 성경공부는 계속할 것입니다. 또 둥지선교회 서북미목회연구원 사역도 꾸준히 이어나가겠습니다.
누군가 얼굴은 앞모습이 아름다워야 하지만 인생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다. 전도와 헌신보다 분열이 화제가 되는 요즘 옥민권 목사는 후임목회자도 결정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용퇴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그는 외유내강의 목회자로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 뒤에 앞으로도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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