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내장’이란 안구의 투명한 수정체에 이물질이 끼어 온통 세상이 안개 낀 것 같이 뿌옇게 보이는 증세입니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그렇게 되기도 하지만 당이 높다던가 눈 관리를 잘하지 못함으로 해서 젊은 나이에도 이러한 증세가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물질은 우리의 눈에 뿐 아니라 때로 우리들의 ‘마음의 눈’에도 끼이게 됩니다. ‘불평’이란 이물질이 끼이게 되면 세상이 온통 불만스럽게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입에 불평이 떠날 날이 없게 됩니다. ‘원망’이란 이물질이 끼이면 모든 것들이 그냥 원망스럽게 보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나 감사함이 자리잡을 수 없어 그저 관계하는 모든 사람을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미움’이란 것이 끼이면 공연히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밉게만 보입니다. ‘욕망’이란 것이 끼이게 되면 가지고 또 가져도 성에 차지를 않아 모든 것을 다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를 쓰는 추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밝고 아름다운 세상 한 번 못 보고, 감사하고 흐뭇한 맛 한 번 느껴보지 못하고 맨날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살다가 불행하게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골은 그의 작품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바로 ‘절망’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진 상태”이고 그것은 곧 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병이라 깨달아 알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의 백내장’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병적 증세를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대신 자기가 가장 정상적인 사람인양 착각하면서 그렇게 교만하게, 어리석게 그리고 추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위에 이런 증세에 걸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이러한 ‘마음의 백내장’에 걸려서 잘못 보고 잘못 믿으면서, 잘못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 침으로 흙을 개시어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 실로암 연못에 가 보았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데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서 있었습니다. 그러한 지형을 보면서 저는 속으로 “예수님도 참 너무 하셨다. 그 불쌍한 소경한테 “네 눈을 떠 보아라”라는 말씀으로 그냥 고쳐주시지 앞을 못 보는 소경을 이런 곳에까지 더듬어 오게 하시다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성경은 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랍고도 커다란 은혜의 선물을 주신다 해도 인간 편에서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응답의 하나는 순종입니다. 순종함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나의 것이 됩니다. 우리의 눈이 잘 안 보일 때, 몸에 이상이 있을 때, 마음에 이상이 있을 때는 치유자가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자신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계획하시는 방법을 일러 주실 겁니다. 그 치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그 “방법(말씀)”에 순종하여 따르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