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도 어느덧 5개월 여가 지나자 조금은 익숙해졌다. 나는 힘든 야채 가게 일을 하는 가운데 주일 아침 한국에 전화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아이들 목소리라도 들어야 마음이 놓이고 또 "아빠, 힘내세요. 건강하세요","여보, 밥 잘 챙겨 드시고 건강하세요. 기도하고 있어요."이 한마디가 그렇게 큰 힘이 될 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격려의 말을 들으면 외로움도 사라지고 생활에 활력소가 되었다. 그러면 나는 "그래, 조금만 참고 기다려. 내가 꼭 성공해서 돌아갈게."말하고 다시금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 굳게 다짐하곤 했다.

5월 초순의 어느 날, 그날도 열심히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정오쯤 되었을까, 건장한 사람 셋이 가게에들어왔다. 미스터 한과 무엇인가 한참 이야기를 하면서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데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감싸는 것이었다. 행여 이민국에서 나왔나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안 돼. 도망을 가야 해.' 그런 생각이 드는데 입구는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나는 물건을 진열하는 척 과일 박스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물건을 진열하는 척 하다가 그대로 팽개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면서 행여 누군가 쫓아오지나 않아 불안한 가운데 몇 블록이나 달렸는지 모른다. 어디 숨으려야 숨을 곳도 없었다. 차라도 타고 쫓아오면 금방 잡힐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때처럼 한국의 골목길이 그리울 때가 없었다. 아파트 계단에 걸터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오 주여,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도망을 다녀야 합니까'라고 신세한탄을 하는데 원망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녁때 미스터 한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었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자세히 물어 봤다는 것이다. 이름이며 언제부터 일했느냐며 행여 무슨 잘못한 일이 있었느냐고 되려 나한테 물었다. 나는 아무 잘못한 일도 없지만 괜히 불안했다. 그들이 이민국에서 나온 사람인지 물었더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면서 확실히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들 이야기로는 이민국 직원이 야채 가게 같은 데로 직접 나와서 단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공연히 불안한 생각에 나는 일을 나갈 수가 없어 두 주간을 그냥 집에서 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미스터 한이 내일 하루만 좀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사정이 딱해서 나는 마지못해 승낙을 하고 일을 나갔다. 그런데 점심때 피자를 먹고 있는데느닷없이 다섯 명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손을 들라고 하더니 나에게 이름을 물어보더니 몸을 수색하고는 수갑을 채우는 것이었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곤 차에 타라고 밀어넣었다. 내가 탄 차는 경찰차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차에 탈 수 밖에 없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무엇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할 줄도 모르고 알아듣지도 못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하나님,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요. 하나님, 큰일났습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저 이제 어떻게 해요. 오 주여, 주여....."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여, 이 종을 불쌍히 여기사 이 환난에서 건져주옵소서"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