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리(明月里)! 지금도 가끔씩 그 마을 이름을 되새겨보면 금새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마을 이름도 아름다운 明月리. 조선 송도의 명기(名技)였던 황진이의 예명과 같은 이름. 그래서 지금도 그 마을! 구석구석 아름답기 그지없었던 그 산과 들, 골짜기와 고갯마루를 그려보면 황진이의 자취인양 그 곳 어디에나 짙게 배어있는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아련한 아침 안개로 나를 혼곤케 한다.

명월리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춘천호수를 거슬러 올라간 북한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골짜기의 작은 마을이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휴전선이 금방 나올 정도로 최전방 지역인지라 그곳에 중부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사단사령부가 있다. 나는 바로 그 부대에서 군생활 3년을 보냈었다. 그런데 왜 30년이 지난 지금 Mr. Bean을 보면서 전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명월리의 그 아침이 떠오를까? 아마 지금도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그날 아침을 잊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내 생애 그처럼 아름다운 아침을 본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처럼 어이없고 허무했던 날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을까?

아직 동이 트려면 까마득한 꼭두새벽이었었다. 그렇잖아도 몇 달 전 오월에 입대하여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바로 얼마 전에 그 부대에 전입한 최고 말단 졸병으로서 지난 밤에 야간 보초까지 섰던지라 얼마나 피곤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동이 트려면 아직 까마득한 시간에 당직사관이 기상, 전원기상을 외쳤다. 너무 너무 피곤하여 세상 모르고 떨어져 자고 있었지만 가뜩이나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졸병인지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아침 점호를 준비했다.

그런데 주번 사관은 온 내무반이 쩌렁쩌렁하게 전원 제설작업 준비를 해서 연병장에 모이란다. 제설작업? 그렇다면 눈이 왔다는 말인가? 아니 지금이 몇 월인데 눈이 와? 그리고 눈이 왔으면 왔지 왜 이렇게 새벽같이 일어나서 제설작업을 해? 그렇잖아도 입대하여 일반 사회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너무 많았는데 이 새벽에 왠 제설작업?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바로 얼마 전에 고참 김상병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며칠 전이었다. 원, 세상에! 아직 초가을인데 눈이 왔었다. 명월리가 고지대에다 최전방에 위치한 곳이라 무더위가 이제 꺽이나 싶었는데 벌써 부대 앞 복주산 꼭대기에서부터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아, 그 불꽃같이 눈부셨던 명월리의 단풍이여! 특히 부대 연병장 주변으로 쭈욱 늘어서있는 히말라야시다 나무의 황금빛 단풍은 석양의 햇살 속에서 얼마나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는지! 그런데 그 울긋불긋 찬란한 단풍 위로 눈이 시리도록 하얀 눈이 쌓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그치자 언제 눈이 왔었느냐 싶게 파아란 저녁 하늘에 걸린 무명빛 낮달. 아, 그래서 明月里로구나. 황진이 같은 시심(詩心)이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서도 그냥 한 구절의 시가 줄줄 나올 정도였다.

겨울이라도 바다 바람이 따뜻한 내 고향 전라남도 고흥에서는 평생을 살아도 그 절기에 도저히 볼 수없는 정경. 그 아름다움에 취하여 이제 갓 입대한 졸병 주제에 고참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와우 진짜 진짜 멋지다라고 환호를 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김상병님이 한 마디 툭 던지길, “야 임마 올 겨울만 지내봐.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가. 아마 눈이 지긋지긋하여 눈만 내리면 진저리를 칠 걸”이라고 했었다. 분명히 어제 밤 내가 보초를 섰던 한 밤중에는 날씨는 쌀쌀해도 눈이 오지 않았었는데 그 후로 내린 눈이 온 세상에 소복했다. 얼마 전에는 눈이 오긴 했었지만 조금 내렸었고 그나마 금방 녹고 말았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에 내린 눈은 초가을답지 않게 많이 내린 눈이었다. 아침 빛이 골짜기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온 사방을 에워싼 높은 산들과 골짜기, 그리고 온갖 색깔로 물들은 단풍 위로 하얗게 쌓인 눈, 그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화를 미술관의 조명처럼 서서히 비추기 시작하는 아침 햇살. 복주산 꼭대기에서부터 비치기 시작하여 골짜기를 더듬으며 서서히 내려오는 조명을 받은 그 작은 마을 명월리는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왜 Mr. Bean을 보면서 전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명월리의 그 아침이 떠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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