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 담화>
루터의 집에서 오후 5시에 나오는 저녁 식사는 쫓겨난 목사들, 수녀원을 도망친 수녀들, 정부 관리들, 외국의 방문객들, 그리고 루터의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들도 같이 나누곤 하였다. 대접을 잘하는 집안 분위기에 맞추어 활발한 대화가 오고 갔다. 이 때의 대화를 일부 제자들이 받아적은 것이 ‘탁상담화’이다.

탁상 담화는 본래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개인용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기록자 각자의 관심거리를 적었고, 그들간에 차이도 있지만 루터의 직접적인 발언이라는 점에서 16세기의 역사를 이해하고 루터의 인격과 생활과 그의 업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역사적 문헌이 된다.
탁상 담화에서 루터는 많은 종류의 주제들을 다루었다. 그는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현상들 가운데에서도 신앙의 심오한 진리를 꿰뚫어 볼 줄 알았으며 그것을 특유의 직설적인 언변을 구사하여 표현하였다.

작은 새들에 대한 관찰에서 루터는 염려 없는 삶의 태도를 배웠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작은 새들을, 별로 소용없는 놈들까지 포함하여, 먹이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이시는지 계산할 수 없다. 내 추측에 까마귀, 수탉, 갈가마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참새들을 먹이시는 데 프랑스 왕의 한 해 수입 보다 더 들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 중에 누가 자기 몸을 생각하여 무엇으로 옷을 입힐까 염려하겠느냐.

”루터는 또한 먹이를 응시하는 개의 모습에서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기도의 본을 배웠다.“아, 저 개가 고기를 쳐다보듯이 내가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개의 모든 생각은 고기 한 점에 집중되고 있다. 개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거나,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흔들림 없이 기도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낙심을 하고 만다.”

<루터의 사망>
파란만장한 삶을 살은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일기 63세 였다(1546년 2월 18일). 이 때 그는 만스펠트의 백작들 사이에 있었던 법적 논쟁을 중재하러 가 있는 중이었다.

루터가 사망하던 밤 의사와 그의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루터는 요한복음 3장16절을 계속 암송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독생자를 주셨으니…” 새벽 세 시가 가까워 요나스 박사는 마지막이 이른 것을 알고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교리와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루터의 몸이 움직이면서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루터의 유해는 비텐베르크로 옮겨져 성(城)교회에 안치되었다.

루터가 죽음의 침상에서 드린 기도

“오 나의 하늘 아버지시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여. 내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황과 모든 악한 자들은 그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독하였으나 나는 그를 믿고, 선포하고, 고백하고, 사랑하고 찬양하였습니다. 내 주 그리스도시여, 내 가난한 영혼을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오 하늘 아버지여, 비록 나는 이 육신을 떠나고 이 생명으로부터 탈취를 당하나 당신 곁에 영원히 머무를 것임으로 아무도 당신의 손에서 나를 탈취하지 못할 것을 확실히 아나이다.”

멜랑히톤의 추도사 말틴 루터 박사! 오 교황이여, 살아서 나는 그대의 재앙이었고, 죽어 나는 그대를 멸망시키리.그는 1546년에 사망했습니다.그는 63년간 살았습니다.64번째 해는 그의 죽음의 해였습니다.그가 죽음을 만났을 때는 2월 18일이었습니다, 밤 두시와 세 시 사이에.그 달의 22일 그는 비텐베르크 교회 안에서 장사 지냈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습니다.

<루터의 장미>
루터는 자신의 문장(紋章)을 만들어 “내 신학의 상징” 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전 종교개혁 가르침의 요약으로 불릴 수 있는 설명을 적었다.
우선 자연색의 심장 안에 검은 십자가가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믿는 신앙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나에게 상기시켜 준다. 마음으로부터 믿으면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검정 십자가로써 육신을 죽이고 고통을 주지만 이것은 심장의 색조를 그대로 남겨 두고 우리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으며 죽음을 가져오지 않고 생명을 보호한다.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이다.
이 심장은 흰 장미의 중앙에 끼워져 있으면서 믿음이 기쁨, 위로, 평화를 가져옴을 보여준다.
요약하여, 믿음은 우리를 화려한 장미의 뜰로 인도한다. 이 평화와 기쁨은 세상의 것과는 다르기에 장미의 색은 희고, 붉은 색이 아니다. 흰색은 영들과 천사들의 색이기 때문이다. 장미는 하늘색 뜰의 배경 속에 있으면서 영과 믿음의 그러한 기쁨이 앞으로 도래할 천상의 기쁨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이 기쁨은 이미 지금 우리의 기쁨속에 있으며 소망으로 감싸여져 있으나,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개혁자 루터>
우리는 루터를 이야기 할 때, 당연히 ‘종교개혁자’라는 칭호를 맨 앞에 붙인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스스로를 ‘개혁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할 수 없이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주의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고, 자신이 설교자, 박사, 교수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삶 가운데 그가 행했던 일들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교회가 새로와졌을 뿐 아니라, 성서 번역, 많은 저작 활동, 작곡과 설교를 통해 사회와 역사가 바뀌고, 잃었던 많은 것들이 되살아났다. 루터는 결코 자신을 ‘개혁자’로서 여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예언자라고 간주되는 것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복음주의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설교자, 박사, 교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개혁자라고 불리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개혁’은 오로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다. 아니, 끌려갔다. 면죄부에 대한 처음의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루터는 자신의 개혁 작업이 자신의 본성적 경향의 결과라든가 아니면 개인의 야망에 의해 야기된 계획도 아니라고 하였다. 루터는 자신을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하나님에 의해 이것 저것에 사용되는 그런 도구로….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일종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고, 박사학위 공부도 어거스틴회의 지도자들이 그의 의지에 반해서 지운 것이었다. 그의 교수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복음이 모든 이들의 소유만 된다면 자신의 활동을 그만두고 싶다고 자주 말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는 하나님에 의해 압도당했고, 자기가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 다녔다.

사람들은 “개혁!”의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우리가 루터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은 중세의 전쟁 구호인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 였다.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때 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끌려갔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집어 던져졌소.”

<루터의 발자취>
‘루터의 시(市)’라고 불리게 된 비텐베르그를 중심으로 그려진 지도. 루터는 바쁜 와중에도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여행의 대부분은 공적인 임무를 띤 것이었다. 루터는 1521 - 22년 이전에는 말을 타고 가거나 걸어서 갔다. 로마도 발로 걸어서 갔다 왔다. 루터의 여행을 자세히 연구한 학자는 여행거리는 약 20,500 km 이며, 그 중 약 8,000 km 를 걷거나 말을 타고 다녔다고 추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