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서양의 종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와 교세를 확장하였다. 크리스트교는 학교와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육영사업을 하였으며, 서양의술을 전파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조선사회에 이미 들어와 있던 천주교도 선교의 자유를 얻어 포교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서양종교의 이념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하여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특히 지나치게 복음주의를 강조하여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의 침략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금성출판사(주)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개항 이후 한일합병 이전까지의 개신교 부분 서술이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도마 위에 오른 이 교과서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전국 고교의 50%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이 교과서의 개신교 왜곡을 비판하고 개선하기 위해 한국교회사학회(회장 김홍기 교수)가 나섰다. 한국교회사학회는 18일 오후 4시 서울 정동제일교회(담임 송기성 목사) 문화재예배당에서 열린 99회째 정기학술대회 주제를 ‘한국 역사교과서의 개신교 왜곡’으로 정하고, 교과서 서술대로 한국 개신교가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침략을 옹호했는지를 분석했다.

발제에 나선 박명수 교수(서울신대)는 금성출판사의 교과서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 개신교는 제국주의적이었나 △개신교는 일본의 침략을 옹호했나 등을 초점으로 논지를 전개했다.

한국 개신교는 제국주의적이었나

금성출판사의 논지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는 지나치게 복음주의를 강조해 제국주의 열강을 옹호했다는 것이다. 박명수 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 개신교가 복음주의적이라는 주장은 타당하다”면서도 복음주의는 강요에 의한 신앙을 진정한 신앙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제국주의와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일부 국사학자들은 서양종교를 서양제국주의의 도구라고 주장하고, 선교사는 제국주의의 앞잡이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독립운동마저 방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교회사학자들까지 개신교 선교가 일정 부분 제국주의적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만일 개신교가 제국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제국주의 팽창과정에서 개신교가 그 힘을 의지해 선교했어야 한다”며 당시 선교사들은 힘으로 선교하지 않았고, 미국 정부가 개신교 선교를 도와주지도 않았다고 단언했다. 정교분리 원칙이 확고했던 미국 정부는 선교사들에게 가능한 대로 한국의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선교할 것을 요청했고, 조선과의 외교정책에서도 종교적인 문제는 가능한 한 배제하려고 했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내무대신 박영효가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려 했으나 선교사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자유”라며 거절했고, 아관파천 이후 조선의 관료들이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와 장로교를 국교로 삼을 것을 제안했을 때도 선교사들은 “정치를 이용해 신자를 확장하려 했다면 수많은 신자를 늘릴 수 있었지만, 그것은 복음주의적인 개신교의 근본정신과 거리가 먼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선교지원을 해외정책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대거 진출한 천주교와 황제의 칙령으로 선교사 파송을 명령한 이후 한국에 진출한 러시아정교회가 선교에 있어 외국의 힘을 이용하려 했다고 박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일반인들은 사실 개신교와 천주교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며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개신교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 해석했다.

개신교는 일제의 침략을 옹호했는가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을 침략하려던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했고,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주장에 대해 박명수 교수는 “당시 조선이 미국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일본이 선교사들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선교사들은 일본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등을 종합해서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미국 등의 열강에 둘러싸여 있었고, 이 가운데 독립을 유지하면서 근대화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하지만 청(중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하려 했고 일본은 한국을 대륙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으며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려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조선은 영토적 욕심이 없는 미국이야말로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적절한 열강이었고, 서재필과 같은 친미 개화파는 미국을 통해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내려 했다. 고종이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것도 청으로부터 독립할 기반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은 미국을 일제의 침략에서 보호해 줄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로 선교사들은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을 주야로 보호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돕지 않았던 것처럼 다른 열강들과 달리 처음부터 유지해 오던 내정불간섭 원칙을 고수했고, 한국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 일제의 한국 지배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선교사들이 친일파였는지에 대해서는 “일본이 자신들의 한국 지배에 미국과 개신교가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는 말로 그렇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면서 “서구제국주의로부터 한국을 보호한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한국과 미국, 그리고 개신교를 분리시키려 했다. 그러나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유지했던 선교사들은 한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했다고 박 교수는 밝히고, “그러나 이 사실을 놓고 개신교가 일본의 침략을 옹호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선교사들과는 달리 한국 개신교인들은 105인 사건이나 3·1독립운동에서 나타나듯이 반일 독립운동에 가장 앞장섰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타 종교와 객관적으로 비교해 달라

▲학술대회를 마치고 기념촬영하는 한국교회사학회 회원들. 왼쪽에서 여섯번째가 이날 발제한 박명수 교수이고, 그 옆이 한국교회사학회 회장 김홍기 감신대 총장이다.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발제 못지 않게 윤경로 교수(한성대 총장), 박용규 교수(총신대), 이은선 교수(안양대) 등이 참가한 논찬도 뜨거웠다. 한국사학자인 윤경로 교수가 포문을 열었다. 윤 교수는 “발제 내용에 총체적으로 동의한다”면서도 “우리끼리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지 의문”이라며 한국근현대사학회 같은 일반 학자들과도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기독교만 옹호하다 보면 사회와 단절될 수 있다”며 “교과서에는 ‘옹호하기도 했다’는 말로 옹호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지 ‘일제의 앞잡이’ 같은 자극적인 말은 없었다”고도 했다.

이에 교회사학자들은 즉각 반박했다. 박용규 교수는 “‘옹호하기도 했다’는 말을 사람들은 대부분 옹호했다는 말로 이해한다”며 학생들에게 균형잡힌 시각을 심어줘야 할 교과서가 그렇지 못한 서술을 했다고 지적했다. 박명수 교수도 “이것은 시각의 문제”라며 “알려지지 않았던 긍정적 측면들을 충분히 알려야 균형이 맞춰지는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난 3월 말에 열린 영익기념강좌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했던 박 교수는 “타 종교에서는 얘기조차 꺼내지 않는 신사참배 문제도 그렇지만, 타 종교와 객관적인 비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이 교과서에는 불교와 천주교, 유교 등이 일제 침략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나와있지 않는데 유독 기독교만 서술돼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쓴 학자들에게 (이날 학술대회 자리에) 나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고도 했다.

한국교회사학회는 학술대회 개최 전인 지난 6월 30일 교육과학기술부 앞으로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기독교 관련부분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며 수정을 요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