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영적 시련>
수도승으로서의 혹독한 고행, 아우그스부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에서 보냈던 압박의 시간들로 인해 루터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통풍, 결석, 소화불량, 두통, 심장 질환, 중이염 등 만성질환에 시달리던 그의 병이 1527년에는 더욱 심각해져 설교도 중단해야 하는 일까지 생겼다. 8월에는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비텐베르크를 휩쓸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인 위험들은 루터의 우울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루터는 전염병을 피해 먼 곳으로 피신해 있던 멜랑히톤에게 또 다른 병에 걸렸노라고 편지를 썼다.“나는 벌써 한 주간 이상을 죽음과 지옥에서 헤매이고 있네. 온 몸은 고통에 빠져 있고 지금도 떨리고 있네.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아서 나는 절망의 폭풍우 아래에서 신성모독의 지경까지 이르러 고통 당하고 있다네.”

이러한 시련의 한가운데에서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루터의 신뢰는 상실되지 않았다. 그의 확신은 외적인 안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바로 이러한 배경하에서 만들어졌다. 루터는 궁극적으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장조로 된 위풍당당한 곡조에 실었다.
3절 악마들로 가득찬 이 세상이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노라, 하나님이 그의 진리가 우리를 통해 승리하도록 뜻하셨으니. 소름끼치는 어두움의 왕? 우리는 떨지 않노라. 그의 분노를 우리들은 참을 수 있으리. 그의 운명은 정해졌도다. 작은 한 말씀이 그위에 덮치리.

4절 그 말씀은 이 땅의 세력들위에 머무르시나니, 이들에게 감사치 말지니라. 성령과 은사는 우리의 것, 우리 곁에 계신 그를 통하여. 재물과 친척, 그리고 이 죽을 목숨도 사라지게하라. 그들은 몸을 죽이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 그 나라 영원하리라.


<소 교리 문답서 와 대 교리 문답서>
병마와 우울증과 싸우면서도 루터는 교회 방문길에 나섰다. 1527부터 28년까지 작센 지방의 교회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찰하는 동안 발견한 교인들의 영적 무지는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카톨릭으로 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복음의 자유가 부여하는 도덕적 책임을 깨달으며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방문에서 돌아온 루터는 교인들의 교육을 위해 ‘소교리문답서’와 ‘대교리문답서’를 썼다. ‘소교리문답서’는 가정에서 어른과 아이들 모두가 함께 모여서 공부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고, ‘대교리문답서’는 특히 어른과 교역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교리문답서들은 전 성경의 요약으로, 일치서로서 ‘평신도의 성경’이라고 불리어졌다. 주제의 배열에 있어서도 복음적 성경관을 다루고 있다. “구원을 위해 세가지가 중요하다. 우선, 십계명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두번째로 사도신조를 통해,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될 때 어디서 중요한 도움을 구하고 찾아야 할지 알아야 한다. 세번째로 주기도를 통해, 이 힘을 어떻게 구하고, 찾고, 얻어야 할지 알아야 한다.”
루터는 자신도 박사이며 설교자이지만 교리문답을 배우는 어린아이같이 행동한다고 하였다. 곧 아침과 하루 어느 때이든지 시간이 날 때마다 십계명, 주기도, 사도신조, 시편 등을 읽고 암송하였다.
루터 자신이 썼었던 교의학적 기본 문제들을 가장 포괄적으로 개관하고 있다.

<마르 부르크 회담>
루터와 그의 동료들이 독일에서 개혁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지역에서는 쯔빙글리(1484-1531)가 개혁을 주도하고 있었다. 루터의 영향을 받았지만 인문주의자였던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 특히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단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행위에 불과했으나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임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성만찬에 대한 논쟁은 이미 1524년 이후로 여러 신학자들 간에 진행되어 왔었는데 이러한 신학적 분열은 개혁 진영의 분열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헷세의 필립공은 신학의 일치를 이루려 1529년 10월 1일부터 나흘간, 마르부르크 회담을 주선하여 신학자들을 초청하였다. 신학의 일치가 더욱 요청된 이유는 그동안 잠정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1526년의 슈파이어 국회 결정이 3년 뒤에 뒤집어져 일부 복음주의 영주들이 ‘저항’(프로테스탄트 라는 교회 이름이 여기서 유래)의 글을 올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마그데부르크의 회담에서 신학자들은 복음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15개 조항’중 대부분에 의견 일치를 보았으나 마지막 조항의 마지막 부분인 성만찬에서 ‘주님의 참 몸과 참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실재로 임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사의 전 과정을 바꾸어 놓았을 개신교 동맹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아우그스 브르크 신앙 고백서> Augusburg Confession
한편 카를 5세는 이듬해 개신교도들과의 논쟁을 종식시키려 1530년 6월 20일부터 11월 19일까지 아우그스부르크국회를 소집하였다. 모든 것이 법과 정의에 따라 진행될 것이라는 약속에 따라 작센의 선제후인 요한은 소집에 응하면서 먼저 루터와 일단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국회에서 제출할 “토르가우 조항”을 작성케 하였다.
국회가 진행되는 동안 국외 추방자로서 참석할 수 없는 루터는 작센 영지 최남단에 위치한 코부르크 성에서 머물면서 국회에서 진행되는 일을 편지로 보고 받았으며 복음적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도록 유약한 멜랑히톤을 독려하였다.

멜랑히톤은 ‘토르가우 조항’등에 기초하여 루터란 신앙의 요약인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6월 25일 낭독된 고백서는 복음주의 교회 교리의 주요 항목들을 21개 조항으로 요약하였고, 다음으로 고쳐져야 할 카톨릭의 오용과 악습들을 열거하였다. 고백서를 읽은 루터는 멜랑히톤이 발을 ‘사뿐히 내디뎠다’고 하면서도 고백서를 “우리의 고백”이라고 인정하였다.멜랑히톤은 루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서 작성을 할 때 “우리는 지금까지 당신의 권위를 따랐습니다.”고 분명히 밝혔다.


<필립 멜랑히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멜랑히톤은 루터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으며 친구 중 하나였다. 그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인 로이힐리의 조카로서 석사학위를 17세에 받고, 21세때인 1518년에 비텐베르크에 희랍어 교수로 부임하였다.

루터가 ‘여윈 새우’라고 부를 정도로 병약한 학자의 전형이었던 그는 신학적으로 루터에게 의존적이었다. 그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이든지, 9년 뒤 코부르크성에 머무를 때이든지, 그리고 루터의 사후에도 마음 든든한 선배를 늘 그리워하였다.

한편 ‘비텐베르크의 에라스무스’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그는 냉철한 조직력의 소유자로서 훨씬 더 즉흥적인 루터와 구별이 되었다. 루터는 멜랑히톤의 방법론적인 신학적 재능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저술들은 장황한 말 때문에 쓸모 없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멜랑히톤은 종교개혁 신학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 표현하였다. 이때문에 그는 후대에 ‘독일의 교사’로 불리어 왔다.


<성서 출판>
분주한 활동을 하면서도 루터는 번역 작업을 계속 하였다. 전체 성경의 출판은 신약 성경의 출판 이후 12년이 걸렸다. 루터는 성경번역을 위해 팀웍이 중요한 것을 알고는 자신이 ‘산헤드린’이라고 명명한 전문가 팀을 식사 전에 초대하여 번역의 수정작업을 하였다. 루터가 번역에 들인 공은 상당한 것으로서, 한 번은 슈팔라틴에게 부탁하여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보석들의 이름과 색상을 알려달라고 하면서 한 번 직접 볼 수 있도록 궁정에서 빌려와 달라기도 하였다. 또 한 번은 여러 마리의 양을 잡아 푸줏간 주인에게 보여 주면서 양의 각 부위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성경에 대한 열심과 진지한 태도는 그의 마음 속에 성경에 대한 겸손한 태도와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신학박사로서 34년간 지내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강해한 그였지만 성경의 깊이와 풍부함에 압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의 사후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종이 쪽지에 적혀있던 글은 이것을 증명해준다.

“어느 누구도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 그리스도, 사도들과 함께 100년 동안 교회를 통치하기 전까지는 성서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믿지 않도록 하라. 이 신성한 Aeneid(성서)를 더럽히지 말고 그것에 머리 숙이며 그 자취에 존경을 표하라. ‘우리는 거지들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