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휠체어의 지휘자’라는 수식어로 잘 알려진 차인홍 교수(오하이오 라이트 주립대학)가 지난 9일(토) 시카고 예수사랑교회(담임 윤국진목사) 개척기념 연속 간증집회 첫번째 주자로 나서 간증을 전했다.
이날 차 교수는 ‘장애’와 ‘가난’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절망하다 하나님 은혜로 기적적인 반전의 인생을 살게 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특별히 차 교수는 간증이 이어지는 사이사이마다 바이올린 연주를 선보여 관객들로 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생후 1년여만에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잃게 된 차 교수. 어린 시절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장애뿐만이 아니였다. 가난한 가정형편에서 태어난 차 교수는 9살이 되던해 대전의 한 재활학교에 맡겨지게 된다. 그는 이 곳에서 배고픔을 견뎌야 했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천대와도 싸워야 했다.
그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비관하다 목숨까지 끊으려고 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희망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시절, 차 교수는 바이올린을 통해 삶의 평안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람취급 안 할때 나는 바이올린을 통해서 위로를 얻었다. 내 스스로를 다스리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 바이올린이 있었기 때문이였다”고 회고했다.
바이올린을 통해 위로를 받긴 했어도 그것 자체가 현실마저 극복하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당시 한국의 교육부는 제도상으로 장애인의 일반학교 진학을 금지하고 있었다. 장애와 가난, 게다가 배움의 기회마저 가질 수 없었던 그에게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였다.
이같은 사회구조속에서 차 교수는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때까지도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한체 절망적인 삶을 이어 나가야만 했다. 그가 가진 학력이라고는 방바닥에 앉아서 배운 초등학교 과정이 전부였다.
“세상을 살아갈 때 희망이 있어야 이유가 생기는데 나는 희망을 가질래야 가질수 없는 현실에 묶여있었다. 스스로 평생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단정하고 생활했었던 같다.”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부인 조성은 씨를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연애를 하고 있었던 당시, 차 교수는 아내 조씨의 제안으로 검정고시에 응시하게 되고 이후 2년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해 중고등학교 과정을 수료하게 된다.
검정고시를 통과했을 무렵, 그에게 꿈도 꿀 수 없었던 미국유학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만약 그때 당시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이 좋은 기회마저 잃을뻔 했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그에게 이 미국유학의 길은 기적과도 같이 그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적시적소에 도움이 손길이 찾아왔었는데 당시에는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돌아볼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였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신시네티 음악대학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쌀(La Salle)4중주단의 사사를 받고 이어 뉴욕시립대학교 브룩크린 음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는다. 그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지휘로 박사학위를 받게되고 2000년에는 83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의 바이올린 교수 겸 그 대학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받게 된다. 또한 지난해에는 이대학 종신제 교수 심사에서도 통과되기도 했다.
차 교수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사람을 통해 소외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게 하셨다”면서 “나같은 사람 쓰임받을수 있는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 취급 받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국까지 보내 주셔서 박사학위 받고 미국 대학교수가 되게 하셨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다. 이제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남은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 일을 위해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고통이 큰 만큼 우리의 축복의 크기도 큰 것이다. 고통도 하나님 안에 있으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내 삶을 통해 검증됐다고 생각한다”면서 “힘들고 어려운 처지 가운데 있는 이들이 나를 통해 힘과 위로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차 교수는 ‘장애’와 ‘가난’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절망하다 하나님 은혜로 기적적인 반전의 인생을 살게 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특별히 차 교수는 간증이 이어지는 사이사이마다 바이올린 연주를 선보여 관객들로 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생후 1년여만에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잃게 된 차 교수. 어린 시절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장애뿐만이 아니였다. 가난한 가정형편에서 태어난 차 교수는 9살이 되던해 대전의 한 재활학교에 맡겨지게 된다. 그는 이 곳에서 배고픔을 견뎌야 했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천대와도 싸워야 했다.
그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비관하다 목숨까지 끊으려고 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희망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시절, 차 교수는 바이올린을 통해 삶의 평안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람취급 안 할때 나는 바이올린을 통해서 위로를 얻었다. 내 스스로를 다스리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 바이올린이 있었기 때문이였다”고 회고했다.
바이올린을 통해 위로를 받긴 했어도 그것 자체가 현실마저 극복하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당시 한국의 교육부는 제도상으로 장애인의 일반학교 진학을 금지하고 있었다. 장애와 가난, 게다가 배움의 기회마저 가질 수 없었던 그에게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였다.
이같은 사회구조속에서 차 교수는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때까지도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한체 절망적인 삶을 이어 나가야만 했다. 그가 가진 학력이라고는 방바닥에 앉아서 배운 초등학교 과정이 전부였다.
“세상을 살아갈 때 희망이 있어야 이유가 생기는데 나는 희망을 가질래야 가질수 없는 현실에 묶여있었다. 스스로 평생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단정하고 생활했었던 같다.”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부인 조성은 씨를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연애를 하고 있었던 당시, 차 교수는 아내 조씨의 제안으로 검정고시에 응시하게 되고 이후 2년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해 중고등학교 과정을 수료하게 된다.
검정고시를 통과했을 무렵, 그에게 꿈도 꿀 수 없었던 미국유학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만약 그때 당시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이 좋은 기회마저 잃을뻔 했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그에게 이 미국유학의 길은 기적과도 같이 그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적시적소에 도움이 손길이 찾아왔었는데 당시에는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돌아볼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였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신시네티 음악대학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쌀(La Salle)4중주단의 사사를 받고 이어 뉴욕시립대학교 브룩크린 음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는다. 그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지휘로 박사학위를 받게되고 2000년에는 83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의 바이올린 교수 겸 그 대학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받게 된다. 또한 지난해에는 이대학 종신제 교수 심사에서도 통과되기도 했다.
차 교수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사람을 통해 소외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게 하셨다”면서 “나같은 사람 쓰임받을수 있는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 취급 받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국까지 보내 주셔서 박사학위 받고 미국 대학교수가 되게 하셨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다. 이제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남은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 일을 위해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고통이 큰 만큼 우리의 축복의 크기도 큰 것이다. 고통도 하나님 안에 있으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내 삶을 통해 검증됐다고 생각한다”면서 “힘들고 어려운 처지 가운데 있는 이들이 나를 통해 힘과 위로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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