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목월 선생 말대로라면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어설픈 것이 아버지일 것이다. 뭘 해도 어설프다. 사랑하는 일도 어설프고, 혼내는 일도 어설프고, 돌보는 일도 어설프고, 위로하는 일도 어설프다.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는 늘 모든 일이 어설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요, 숨기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요, 아버지라는 이름이 가져다 주는 어설픈 무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 박목월 선생은 이렇게 노래했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지난 1월 19일 한국에서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떠나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임종에 함께 하지 못했다. 물론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런 핑계는 실상 변명이라는 것도 될 수 없는 핑계이다. 새벽녘 화장실에 가셨다가 그 길로 쓰러지셔서 정말 졸지에 세상을 떠나셨다.
10여 년 전 가벼운 뇌출혈을 겪으신 후 늘 시름시름 앓아 오셨던 아버님이셨다. 매사에 자신이 없었고, 늘 부정적이셨던 그런 아버님이셨다. 운동하라는 성화에도, 여기 미국에 잠깐 오시라는 간청에도 아버님은 입을 굳게 다무셨다. 걷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특히 여행하는 것은 엄두가 나질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랬다. 아버님은 늘 어설프셨다. 가정을 위한 희생에도,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일에도, 자식들을 사랑하는 일에도, 또 그것을 표현하는 일에도 아버님은 늘 어설프셨다.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 주일 전화 통화에서 아버님은 그 동안 속에 담아두셨던 말씀을 내게 하셨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 한 일은 네 엄마와 결혼한 일이다...” 그리도 사는 내내 싸우고 볶고 아파하시면서도 떠날 날이 가까워지는 것을 직감하셨던지 평소에는 손톱만큼도 암시하지 않았던 그 말씀을 내게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였을까? 사북 탄광지대에서 재정담당 직원으로 일하시던 아버님이 너무 오랫동안 집에 오시질 않자, 어머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가서 보고 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밤새도록 깜깜한 바깥을 내다보며 어느덧 사북 역에 도착했다. 맞으러 나오신 아버님 손을 잡고 식당에 가서 출출한 배를 채우고, 혼자 사시던 방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만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언뜻 잠이 깨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잠든 척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 돌아오신 아버님이 자고 있던 나를 보시고는 당신의 품에 꼭 껴안고 계셨던 때문이다. 귀를 울리는 시끄러운 매미소리와 함께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버님의 품 안에 안겨 잠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랬다. 어설픈 아버지였다. 그리고 지금 나 역시 어설픈 아버지가 되어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요, 숨기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요, 아버지라는 이름이 가져다 주는 어설픈 무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 박목월 선생은 이렇게 노래했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지난 1월 19일 한국에서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떠나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임종에 함께 하지 못했다. 물론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런 핑계는 실상 변명이라는 것도 될 수 없는 핑계이다. 새벽녘 화장실에 가셨다가 그 길로 쓰러지셔서 정말 졸지에 세상을 떠나셨다.
10여 년 전 가벼운 뇌출혈을 겪으신 후 늘 시름시름 앓아 오셨던 아버님이셨다. 매사에 자신이 없었고, 늘 부정적이셨던 그런 아버님이셨다. 운동하라는 성화에도, 여기 미국에 잠깐 오시라는 간청에도 아버님은 입을 굳게 다무셨다. 걷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특히 여행하는 것은 엄두가 나질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랬다. 아버님은 늘 어설프셨다. 가정을 위한 희생에도,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일에도, 자식들을 사랑하는 일에도, 또 그것을 표현하는 일에도 아버님은 늘 어설프셨다.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 주일 전화 통화에서 아버님은 그 동안 속에 담아두셨던 말씀을 내게 하셨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 한 일은 네 엄마와 결혼한 일이다...” 그리도 사는 내내 싸우고 볶고 아파하시면서도 떠날 날이 가까워지는 것을 직감하셨던지 평소에는 손톱만큼도 암시하지 않았던 그 말씀을 내게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였을까? 사북 탄광지대에서 재정담당 직원으로 일하시던 아버님이 너무 오랫동안 집에 오시질 않자, 어머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가서 보고 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밤새도록 깜깜한 바깥을 내다보며 어느덧 사북 역에 도착했다. 맞으러 나오신 아버님 손을 잡고 식당에 가서 출출한 배를 채우고, 혼자 사시던 방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만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언뜻 잠이 깨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잠든 척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 돌아오신 아버님이 자고 있던 나를 보시고는 당신의 품에 꼭 껴안고 계셨던 때문이다. 귀를 울리는 시끄러운 매미소리와 함께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버님의 품 안에 안겨 잠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랬다. 어설픈 아버지였다. 그리고 지금 나 역시 어설픈 아버지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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