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간호와 장례 준비로 엘에이에 가 있던 아내가 지난 1월 3일 밤 10시 20분경에 전화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방금 돌아 가셨답니다. 조용히 편안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어린 소녀 시절에 목사 사모가 되겠다고 헌신하신 후 평생을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셨습니다. 당대의 여성 인재들의 집합 장소였던 이화여대를 나오셔서 서대문 산동네에서, 미아리 시장 가에서 교회를 돌보고 섬기는데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잠시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학교 교직원으로 일하셨던 것도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목사 가정 살림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아들 때문에 구화학교 도서관장을 하시면서 매일 책을 빌려다 주셨습니다. 어느 날 내 생애에 가장 행복한 날이 왔었습니다. 어려운 목사 살림에 세계 문학 전집을 사 주신 것입니다. 너무도 좋아서 일 주일만에 다 읽어 버렸습니다.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자랑스럽게 다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속이 상해 야단을 치셨습니다. 천천히 오래 읽어야지 그렇게 빨리 읽으면 어떻게하냐고 하셨습니다. 아들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사주시지 못해 속 상하셨던 마음을 이해하는데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어린 시절 달 반이 지나지 않아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어디서 미군 부대에서 나온 토마토 스프를 가져다가 감자 몇 개 썰어 넣고 국을 만들어 며칠씩 온 식구가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에 막내도 학교 다니기 시작했으니 다시 공부하시겠다고 신학대학원 목회석사 과정에 등록을 하셨습니다. 삼월이어도 찬바람이 벽에서 마구 흘러내리는 밤에 작은 탁자 방에 펴고 아랫목에 마주 앉아 공부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들은 영어 알파벳을 외우고 어머니는 헬라어 알파벳을 외우시고.

대학생 시절에 성경 공부와 제자훈련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대학부와 청년부에서 소그룹을 조직해서 네비게이터 교재를 사용해 제자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평신도 중심의 자체적인 제자훈련을 경계하던 시절에 어머니는 오래 동안 아들이 하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지켜보셨습니다. 어느 날 불러 앉히시더니 당신을 제자 훈련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신학대학원까지 나오신 분이 대학생 제자 훈련을 아들에게 받아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해도 배울 것은 아들에게도 배워야 한다면서 몇 달에 걸쳐서 꼼꼼하게 아들 앞에 앉아 성경공부를 하셨습니다.

은퇴한 남편을 따라 연변에 들어가셔서 연변과기대에서 섬기셨습니다. 학교 도서관장을 하신 경력을 가지고 연변과기대의 도서관 사서로 정식 체류허가를 받으셨습니다. 학교에서 만난 학생들을 한 사람씩 불러 아들에게 배운 제자훈련을 또박 또박 가르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훈련받고 변화된 학생 때문에 연길시에서 유명한 사회주의 철학교수를 전도하고 훈련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북한 선교와 구호 사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평생 남편과 함께 부르짖었던 100나라 선교 100교회 개척을 조금이라도 더 이루고자 애를 쓰셨습니다. 마지막 뵙고 하직 인사할 때 예배를 드렸습니다. 며느리가 특별 찬양할 곳을 말씀하시라고 했습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친 후 불러라. 나는 주님이 맡기신 다 마쳤다." 맡기신 일 다 마치시고 이 땅의 삶을 마치신 날은 제 아내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자손이 그 생애를 이어가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위 칼럼은 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인 '연우포럼'(www.younwooforum.com)과 합의하에 전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