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남 ‘목포’라고 하면 금방 떠오르는 게 뭘까? 두 가지다. ‘홍어’와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이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에 대해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목포의 눈물>은 단순한 옛날 유행가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목포 사람들의 상실감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식민지 민족의 슬픔을 담아낸 한국 대중가요사의 상징적인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이난영’이라는 여류 가수다.
[2] 이난영의 애절한 목소리와 곡의 서정적인 선율이 결합하면서 그녀를 한국 가요사의 대표적인 가수로 만들었다. 목포는 일제강점기에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일본과 연결되는 항구로 성장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식민지 수탈과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던 공간이기도 했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의 가사 속에 ‘목포인의 설움’이 여러모로 겹쳐있음을 볼 수 있다.
[3] 하지만 이번 목포 방문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의미의 ‘목포의 눈물’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 이번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목포가 호남 개신교의 중요한 출발점이었으며, 위대한 순교자도 탄생시킨 고향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목포 인근 여러 섬마을에서 감동적인 순교자들이 배출되었다는 점은 더없이 소중한 사실이다.
첫날 탐방에서 ‘윤치호와 윤학자 부부’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4] ‘거지대장’으로 불리던 윤치호는 복음 때문에 버려진 아이들을 품었고, 그와 결혼한 일본인 부인 윤학자는 그 사랑을 이어받아 자신의 국적과 민족을 넘어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1968년 10월 31일, 윤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이 목포에서 열렸다. 그날 무려 3만여 명의 목포 시민이 장례식에 모였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장례는 ‘제1회 목포시민장’으로 치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5] 생각해 보라. 일본에서 태어난 여자였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관리였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을 때, 목포 시민들이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일제로부터 엄청난 수난을 받은 목포 시민들이 어째서 한 일본 여인의 죽음에 대성통곡을 했을까? 그녀가 어느 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누구를 위해 살았는가를 목포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6] 남편 윤치호는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어주었다. 일본인 부인 윤학자는 남편을 잃고도 그 아이들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이 그들을 지켰고, 목포가 그들을 품었다. 처음에는 윤치호와 윤학자가 아이들을 품었다. 그다음에는 아이들이 윤학자를 품었다. 마지막에는 목포 전체가 윤학자를 품었다. 그래서 윤학자의 죽음은 한 일본 여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7] 목포가 자기 어머니를 잃은 날이었습니다.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이 아니라 ‘한학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포의 눈물’이 더 의미가 있는 말이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고선 국가를 초월한 사랑과 존경이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제 설교세미나를 마치고 오늘 케이블카를 타고 목포를 떠난다. 긴 강의로 몸이 많이 지쳐있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내게 너무도 큰 감동과 도전을 주는 시간이었다.
[8] 목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윤치호와 윤학자 부부의 공생원에서의 섬김과 사랑, 문준경 전도사와 이판일 장로 일가의 성스런 순교 등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감동으로 내 가슴에 뜨겁게 남아 있다. 아쉬운 점은 이처럼 위대한 신앙의 거성들의 발자취에 대해서 정작 목포와 주변 해당 지역에 있는 이들은 잘 모른다는 점이다.
<한국판 조지 뮬러>와 <한국판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
[9] 한국 교회가 ‘주기철과 손양원 목사의 순교’에 대해선 잘 알아도 목포와 주변 섬에서 벌어진 위대한 선배들의 감동적인 스토리에 대해선 무지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쉽게 다가온다.
다음 주부터 개강이 시작된다. 강의에서건 세미나에서건 앞으로 주기철과 손양원 외에 제3, 제4의 위대한 선배 신앙인과 순교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것이다. 각 교회에서 국내 기독교 유적지 탐방도 줄지어 일어나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