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사로 살아남기
군산의 사정은 서울보다도 훨씬 열악해서 일부 식량을 제외하고는 석탄과 같은 땔감은 물론 사소한 생활용품조차도 구하기가 쉽지 않아 본국에서 날라와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구입한 물품을 배편으로 보낸다 해도 일본과 제물포를 거쳐 군산까지 탁송託送되는 소요 시간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걸리기도 해, 때때로 식품이나 생활용품이 바닥이라도 나면 선교사 가족들은 제물포에서 배가 들어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야만 했다.
"쌀이라든지 닭과 계란은 시장에서 구할 수 있었으나 땔감과 석탄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생활용품 가운데 어떤 것은 제물포에서도 가져올 수 있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구입해 세관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에 제물포로부터 군산에 들어오는 증기선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모든 환경이 생소한 데다 육아용품이나 생활용품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꾸려가야만 하는 선교사 아내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교사 아내들은 행여라도 말씀을 전하는 남편들에게 누累가 되거나, 현지인들이 복음에 잘못된 편견을 갖게 될까 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다.
"난로가 (화재에 취약한) 초가집에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이 되어 일 년이 넘도록 모든 요리는 석탄 화로만을 사용했는데 그 후로도 전킨 부인은 난로를 가지고는 있었으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사용하지 않았고) 드루 부인은 아예 갖고 있지도 않았다. 이 헌신적인 선교사 부인들은 (조선의) 아낙네들이나 어린이들과 우정을 쌓아가는 것 말고 다른 어떤 것에도 일절 그들의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모범적인 생활을 통해 교인들이 배워야만 하는 (기독교)가정의 모델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 군산의 초기 선교사역
전킨과 드루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짝을 이루어 진료와 복음 전도를 병행했다. 드루가 주중에 진료를 시작하면 전킨은 진료소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주일에는 그들을 데리고 예배를 드렸다. 진료소에 환자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점차 교류하는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안타깝게도 남녀가 동석할 수 없다는 관습 때문에 여자들은 교회에 나올 수도 없었다.
"드루는 진료소를 열어 환자를 돌보았고 전킨은 기다리는 환자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초창기에는 남녀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관습 때문에 여자들은 교회에 오는 것조차도 어려움이 많았다."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믿음이 확인되는 사람을 만나면 세례에 앞서 먼저 학습 문답의 과정을 통과하게 했다. 선교 초기부터 자주 등장하는 학습 교인(catechumen)이라는 용어는 세례가 신중하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의도에서, 초신자에게 문답을 받게 한 다음 시간을 두고 신앙고백과 서약을 통해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예비신자 제도였다.
1896년 군산지부에서 최초의 학습 교인이 생겼고, 그해 7월에는 최초의 수세자가 나왔으며 그해 10월에는 유아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1896년 4월 6일에 송영도, 김봉래, 차일선이 첫 학습 교인이 되었으며 그중 송영도와 김봉래는 7월 20일 세례를 받았다. 10월 4일에는 송영도의 딸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 데이비스의 부임과 사역
하위렴은 데이비스가 군산에 부임하게 된 경위와 시기에 관해서도 설명해 두었다. 1896년 인성부재에서 열렸던 연례회의에서 데이비스의 군산 사역이 결정되자 데이비스는 한 달간의 준비를 마치고 군산에 내려왔다. 그녀는 지부의 선교사들과 합류하면서 매 주일 사람들을 모아 전킨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데이비스는 주일예배에 함께 동석할 수 없는 부녀자들과 어린이들만을 주중에 따로 모아 말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해(1896) 연례회의가 서울의 인성부재에서 열렸을 때 바로 데이비스 양의 군산 사역을 결정했으며 그녀는 한 달이 지나서 군산에 도착했다. 매 주일 전킨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몇 사람의 남자가 참석했다. 시계를 가진 자가 아무도 없고 종을 쳐서 부를 수도 없어 깃발을 사용했는데 여성 모임을 알리는 색깔, 아동 모임을 위한 색깔을 구별해 사용했다. 주중에도 두세 차례 모였으나 모두가 잘 참석했다."
그녀가 주중에도 궁말 지역을 찾아 부녀자들의 모임을 인도한 것을 보면 스테이션을 이곳으로 이전하기 전에도 이미 이 지역에 교인들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육로로 4.5 마일(배로 2마일) 떨어진 궁말에서 열리는 여성을 위한 주간 모임은 데이비스 양이 인도했다. 1897년부터는 데이비스 양의 커다란 온돌방이 모임을 위해 개방되기도 했다."
• 해외 선교부 총무 체스터 박사의 방문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였던 체스터 박사는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세계 각국의 선교지 가운데서도 특히 아시아 선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조선 선교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 내한 선교 초기부터 여러 차례 조선을 방문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선교사들과 함께 전라도 지역 답사를 직접 지휘하며 각 지부의 스테이션 선정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지부가 세워지고 얼마 안 되어 선교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그가 군산을 방문했을 때 지부의 선교사들이 마련한 환영 행사를 지켜본 주민들이 군산에 서양 선교사들이 정착해 활동한다는 소문을 내자, 삽시간에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을 만나보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해외 선교부 총무 체스터(Dr. Chester) 박사가 군산을 방문해 성원과 격려를 해주기도 했는데 선교부 남자들이 다 나와 해 질 무렵쯤 마을 서편의 언덕에서 한 시간 동안 폭죽을 터뜨리기도 하고, 체스터 박사를 위해 맛있는 고기 요리로 푸짐하게 대접하기도 했다. 얼마 가지 않아 군산에 외국인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인근 지역에 다 알려지게 되면서 이 지역에 주민들이 선교사들을 보려고 찾아오기도 했다."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전킨은 주일마다 설교했는데 설교에 대한 반응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이 지역이 신속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토요일 저녁에 집을 떠나 몇십 리를 걸어오기도 했다.
• 선교부의 이전계획과 하위렴의 활약
개항이 발표되기 한해 전(1898) 이미 수덕산 일대가 조계지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교부에서는 스테이션 이전대책을 논의하면서 테이트와 하위렴 선교사를 위원으로 지명해 책임을 맡겼다. 하위렴은 부지 매입과정을 설명하면서 전도선의 계류繫留여부를 확실하게 해달라는 드루의 의견을 참고해 강변이 바라다보이는 궁말 지역의 언덕을 부지로 선정했음을 밝히고 있다.
"1898년 전주에서 연례회의가 열렸을 때 위원회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스테이션 부지 선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테이트와 하위렴 선교사에게 스테이션의 부지 선정을 돕도록 지명했는데, 두 사람은 곧바로 군산에 내려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선창에서 남동쪽으로 일 마일 반 정도 떨어진 언덕에 부지를 정했다. 다행스럽게도 궁말 언덕 기슭까지 연결된 강은 전도선의 좋은 선착장을 드루에게 제공했다."
• 선교부 이전으로 교회가 나뉘다
지부 내 유일한 교회였던 군산교회가 자연스럽게 나뉘게 되는 경위도 이야기하고 있다. 군산의 개항(1899)이 발표되자 조계지 내에 있던 스테이션을 조계지 밖으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군산교회는 지역 이름을 따라 궁말교회(구암교회)로 불렸다. 한편 형편상 그곳으로 따라갈 수 없었던 교인들이 그들 나름대로 시내에서 모임을 유지하다가 1906년 가을 그들만의 예배처에 교회를 따로 세우고 개복교회라 이름하였다.
후에 군산 최초 교회의 타이틀을 놓고 구암교회와 개복교회가 다투기도 했는데, 군산교회가 궁말로 옮겨 구암교회가 되고, 옮기지 못하고 남아있던 교인들이 개복교회로 이어졌으니 최초를 놓고 두 교회가 서로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군산이 개항되고 나자 조계지 안의 조선인 집들은 다 철거가 되면서 신도시 조성계획에 따라 도로들이 새롭게 정비되기 시작하자, 교인들 역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면서 대다수가 궁말교회로 옮겨가 버리는 바람에 남아있던 군산 교인들의 조직적인 사역은 1906년이 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단이 되고 말았다."
• 드루의 전도선 사역
드루는 처음부터 군산이 가지고 있는 포구로서의 입지 조건을 높이 평가했다. 물류 통로로서의 가치는 물론 무엇보다도 육로교통의 불편함을 대신해 전도선을 타고 금강과 만경강 그리고 고군산 열도를 다니며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강력한 지론이었다. 군산지부의 잔류결정과 유지는 전적으로 의료선교에 중점을 둔 드루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부위렴의 부임과 알비와의 결혼
1899년 부위렴 선교사가 군산지부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봄에 리비 알비Libbie A Alby양이 뒤따라 군산에 합류하면서 미혼이었던 두 선교사가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골인하자, 선교사들 사이에서 군산은 큐피드의 화살이 날아드는 곳이라는 무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부부 선교사로 군산 선교에 평생을 헌신했으며 전킨 선교사와 그리고 그 후임으로 부임했던 하위렴 선교사와 함께 이 지역 선교에 크게 이바지했다.
• 전킨 내외의 교육 사역
군산에서의 교육 사역은 전킨 선교사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그해 1902년 몇 명의 소년을 모아 가르치면서 영명학교가 시작되었고, 전킨의 부인, 메리 역시 그녀의 거실에서 여학생을 가르치면서 여학교를 처음 시작했다. 당시 남학생 교실은 지금 병원의 일부가 되었으며 여학생을 가르치던 학교는 여학생 기숙사가 되었다.
하위렴은 선교사들의 정착 과정에서부터 궁말 스테이션의 개설과정과 초기사역을 자세히 기술하고 글을 마감하고 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