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다시 금강을 따라 궁말 언덕에(1915~1928)

3차 안식년(1912~1915)을 마치고

1912년에 신병 치료차 미국에 돌아갔던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이태를 훌쩍 보내고, 1915년에 접어들고 나서야 조선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에드먼즈의 회복이 늦어진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에드먼즈의 친정아버지 노아Noah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그해 겨울을 캐나다에서 체류했던 원인도 있었다. 그는 78세의 나이로 1914년 성탄을 2주 앞둔 12월 11일 세상을 떴다.

그들이 캐나다에 머무는 수 주간동안 몰아친 한파와 눈 폭풍으로 에드먼즈의 친정이 있던 온타리오의 시골 마을은 수 피트나 쌓인 눈으로 통행이 어려웠다. 하위렴은 장인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도 한 동안을 캐나다에서 머무르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미국으로 내려와 내한 준비를 서둘렀다.

1915년 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베로 향하는 우편 증기선 시베리아Siberia호에 몸을 실었다.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무는 동안 두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 벌써 셀리나가 6살, 찰스가 4살이 되고 있었다. 해외 선교부에서도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건강을 회복해 조선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내한 선교부에 단신으로 전하며 함께 축하해 주었다.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베를 항해했던 시베리아Siberia호
(Photo : )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베를 항해했던 시베리아Siberia호

그 배에는 중국, 일본 그리고 조선으로 파송되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하위렴 선교사 내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해 처음으로 임지에 나가는 남장로교 초임선교사들로 하위렴 선교사의 어린 두 자녀를 포함해 일행은 모두 11명이나 되었다. 2주간의 항해 끝에 태평양을 건너 고베에 당도했고, 다시 하위렴 선교사의 일가족이 제물포를 거쳐 군산에 도착한 날은 그해 2월 27일이었다.

1915년 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베리아siberia 호에 승선한 선교사 일행
(Photo : ) 1915년 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베리아siberia 호에 승선한 선교사 일행

이때 시베리아 호에 함께 승선했던 일행 가운데 토마스 윌슨Thomas E. Wilson(1886~1917) 이라는 선교사가 있었는데, 아칸사스주 컬럼버스Columbus, AR가 고향인 그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한 하위렴의 후배로, 건장하고 열정이 남다른 젊은 목사였다. 그는 조선 선교 상황을 보고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그곳에서 하위렴 선교사를 만나 조선 선교를 지원한 초임선교사였다.

미혼이었던 그는 파송이 되면서 곧바로 광주지부에 부임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보다 먼저 내한한 여선교사 조지아Georgia C. Willson 양을 만났다. 2년여 교제 끝에 동료 선교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1917년 5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곧바로 광주로 내려와 선교사 숙소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T. E. Wilson 선교사
(Photo : ) T. E. Wilson 선교사

신혼의 단꿈도 채 가시지 않은 그해 가을, 윌슨T. E. Wilson 선교사는 아내의 태중에 유복자를 남긴 채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광주지부는 물론 남장로교 동료 선교사들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고개를 떨구며 안타까워했다. 그해 아내 조지아는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미국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하위렴은 자신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선교사를 자원했던 후배 선교사가 조선에 파송되어 사역다운 사역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는 것에 더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조선에 파송되어 죽음을 맞았던 동료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을 떠올리며 그는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전킨과 그 세 자녀의 죽음, 유진 벨의 두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아내 데이비스의 죽음, 오웬 선교사의 죽음과 그리고 이번엔 후배의 죽음까지, 계속해 이어지는 선교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조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조선 선교에 대한 자신의 각오를 다시 한번 새롭게 했다.

다시 군산으로(1915)

하위렴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군산에 부임하던 2월 27일은 때늦은 폭설이 내렸으나 하위렴의 귀환에 대한 환영을 막지 못했다. 그가 군산지부로 다시 돌아온 것은 거의 7년여 만으로 그동안 지부 산하 교인들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를 잊지 않고 찾아와 반기며 환영했다. 하위렴은 동료 선교사들과 지역교회의 뜨거운 영접에 몇 주 동안은 정신없이 지냈다.

자신이 떠나있던 7년 동안, 군산은 몰라볼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조계지를 중심으로 시내 곳곳의 거리가 죄다 일본식 가로街路명으로 바뀌었고 일본풍의 가옥들이 줄지어 들어서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고 있었다. 호남평야의 미곡을 손쉽게 반출할 목적으로 군산항에서 내항까지 철로를 연결한 인입선 공사와 대형선박의 접안接岸을 위한 축항 공사까지 마무리되어 부두의 모습은 몇 해 전과 비교해 사뭇 달라져 있었다. 죽성포 근처의 해안을 매립한 터에 세워진 대형창고와 정미소들은 이채롭기까지 했다.

자신이 군산을 떠나기 전 이미 개통되어 있던 전주-군산 간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까지 되어 전국 최초의 신작로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한편 호남선이 이리까지 연장이 되면서 이리가 교통의 요지로 자리를 잡게 되자, 군산은 경술국치(1910) 이후 전국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동양척식회사를 앞세워 일본인 농업이민자를 모집해 조선에 정착시키고자 했던 일제는 먼저 이 지역에 수리조합을 세웠다. 그리고는 농경지를 헐값에 사들여 곳곳에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몇 해 가지 않아 호남평야 일대의 대다수 농민은 농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개항장 군산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고지대에 무허가 판잣집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빈민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군산은 서서히 식민지 수탈의 현실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도시 빈민으로 전락해 버린 그들에게 한 가닥의 유일한 위로는 교회였다. 그들이 교회로 몰리면서 스테이션 내 구암교회는 물론 시내에 있던 개복교회도 교인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교회 증축의 필요를 느낀 두 교회 모두 장로를 한 사람씩 더 세워야만 했다

한편 하위렴 선교사가 자리를 비웠던 동안(1908-1915) 순회지역 내에 60여 개나 되는 교회를 겨우 두 선교사(부위렴과 매요한)가 몇 사람의 조사만을 데리고 이끌어왔다는 사실은 그들의 노고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목회자가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교회를 지켜온 교인들을 보는 순간 하위렴은 하나님께서 조선과 조선인 앞에 펼쳐두신 푸른 미래를 보는 듯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