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갯머리 상소는 막을 길이 없다'는 말이 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최근에 듣는 인명은 재처(人命在妻)와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이란 유행어도 같은 뜻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원뜻은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였다. 최근 이 말의 해석이 바뀌었다. ① 남자의 존재 의미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② 남자의 존재 의미는 여자의 비용을 대주는 것이다, ③ 남자의 존재 의미는 여자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다, ④ 남자의 존재 의미는 여자를 (기뻐서) 비명 지르게 만드는 것이다 등으로 발전하고 있다. 실로 여권 신장의 발전상을 보는 것 같다.
남자들이 모이면 아내에게 예쁜 짓하며 호감 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① 나는 아내의 아내에 의한 아내를 위한 남편이 되겠다. ② 나는 아내를 존경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③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④ 아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나 생각하기 전에 내가 아내를 이해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라. ⑤ 내일 이 세상에 종말이 와도 나는 오늘 아내를 위해 세탁과 청소와 설거지를 하겠다는 등의 선언과 약속들이 이야기되고 있다.
나는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영부인이 국민의 염려와 애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서, 대표적인 모범 영부인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제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Anna Eleanor Roosevelt, 1884. 10. 11- 1962. 11. 7) 여사이다.
힐러리는 엘리너 루스벨트를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했고, 포드 대통령의 부인 베티 포드도 그를 '귀감'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는 강인하고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미국 여성들의 화신이었다.
10살 때 고아가 되어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는 운명적으로 '루스벨트(Roosevelt) 家'의 여성이었다.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삼촌이었고, 남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먼 친척 오빠였다.
그가 5명의 자녀를 키우며 내조에 충실했던 기간에 남편은 상원의원과 해군성 차관보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모와 양처를 꿈꿔온 그의 결혼 생활은 1918년 남편과 자신의 비서 루시 머시아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평생동안 겉으로만 부부였다. 의례적인 자리 외에는 별거했고 공식 행사가 아니면 식사도 따로 했다. 그러다 1921년 루스벨트가 소아마비에 걸리면서 엘리너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남편을 대신할 정치적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그는 이제 독립적인 공인이었고 남편과는 정치적 동반자였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됐을 때, 엘리너는 백악관 생활 첫 해에만 6,500km 거리를 돌아다니며 남편에게 뉴딜 정책의 진척사항을 보고했고, 신문에 칼럼 'My Way'를 쓰면서 때로는 남편의 정책을 지지하고 때로는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정치적으로도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의회에서 증언을 하고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전국 당 대회에서 연설을 한 최초의 영부인(First lady)이 되었다. 1945년 루스벨트가 사망한 뒤에도 그는 미국의 UN 대표로 활약했으며, UN 인권의원회 의장으로서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했다.
1950년대 KKK단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그의 목숨에 현상금을 걸었을 때도 아랑곳하지 않고 권총을 소지한 채 남부 지역을 찾아 나섰던 당찬 여성 지도자였다. 1962년 11월 7일 그가 숨을 거둔 침대 곁에는 버지니아 무어의 詩, '푸시케'가 놓여 있었고, 책상에는 "1918"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엘리너가 남편의 외도를 알았던 바로 그 해(1918)였다.
엘리너 여사의 시를 보자.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삶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들만이 당신의 마음속에 발자국을 남기지요/
스스로를 조절하려면/ 당신의 머리를 사용해야 하고/ 다른 이를 조절하려면/ 당신의 마음을 사용해야 하지요/
노여움(anger)이란 위험(danger)에서 한 글자(d)가 빠진 것 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처음 배신했다면/ 그건 그의 과실이지만/ 그가 또다시 당신을 배신했다면/ 그건 당신의 과실입니다/
커다란 마음으로/ 사상에 대해 토론하고/ 중간이 마음으로/ 사건에 대해 토론하며/ 작은 마음으로/ 사람에 대해 토론합니다/
돈을 잃는 것은 작은 것을 잃은 것이요/ 친구를 잃는 것은 큰 것을 잃는 것이며/ 신뢰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입니다/
어제는 역사(history)이고 내일은 신비(mystery)이며 오늘은 선물(present)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