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우리 교회에 영어권 형제자매들이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이미 영어로 생각하고, 학교와 직장에서 매일 영어권 이웃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우리 함께 해요"라고 따뜻하게 말했는데 "구체적으로 뭘 하자는 건데요?"라는 반응이 돌아옵니다. "마음을 이해합니다"라고 했는데 "그래서요?"라는 표정을 짓습니다. '내 말과 표현이 왜 안 통하지?' 하는 생각을 하신 적 없나요? 더 큰 문제는, 이들과 통하지 않으면 과연 나는, 우리 가족은, 우리 교회는 어떻게 이들과 관계하며 살까요?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전 9:22,새번역). 바울이 이렇게 여러 모습으로 산 이유는 단순합니다. 복음은 다양한 사람에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네트워크 안에 삽니다. 내 자녀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야 행복합니다. 내가 직장 동료들과 소통해야 일도 풀립니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어야 복음도 전해집니다. 나만 잘 살 수 없습니다. 내 가족, 내 이웃, 내 동료가 함께 살아야 나도 삽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 문화는 "우리, 함께, 공감" 같은 언어를 중시하지만, 미국 문화는 "개인, 차별화, 명확성"을 우선합니다.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은 한국에서는 따뜻하지만 영어권에서는 그래서 '당신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이 먼저 나옵니다. "함께 성장하자"는 한국식 표현은 영어권에서는 "우리가 당신을 이끌어줍니다"처럼 앞서 나아가는 힘으로 바꿔야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번역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이 땅에서 함께 살아 가려면,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이번 주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다. 우리 자녀나 동료나 영어권 형제자매 중 한 명을 말입니다. 그에게 복음을 나누고 진짜 관계를 맺고 싶다면, 이렇게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자녀에게는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먼저 물어보고 경청해 보세요. 동료에게는 감정 표현보다 구체적인 제안으로 대화를 시작해 보세요. 영어권 형제자매에게는 '우리는 믿습니다' 대신 '이것이 우리의 방식입니다.' 처럼 명확하게 설명해 보세요.
저도 가끔, 한국식과 미국식 언어 사용에 혼란을 겪지만, 그래도 바울처럼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 문화의 다리를 놓는 노력을 지속하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시애틀에서 선교적 삶을 사는 지혜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작은 이해가 복음의 문을 열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드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