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을 맞이한 2025년, 한국과 일본 국민들은 더 이상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지 않는다. 양국을 오가는 관광객들은 계속 늘어나고, 심지어 양국 간 스포츠 경기에서도 승패에 지나치게 연연하기보다 성숙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광복 후 80년이 지나면서 최소 3-4세대가 흐르기도 했지만, 우리나라가 갈수록 전 세계에서 위상이 높아지면서 여유와 자신감이 생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일본과 일본인들을 직접 경험한 이들도 늘어났고, 북한과 중국이라는 '이 구역 최대 빌런'들을 함께 상대하면서 어느 정도 동병상련과 동반자 의식도 생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크리스천으로서 바라보는 일본은 복음화율 1% 미만의 '피선교지'이기도 하다. 광복 80년이자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한국·일본 양국의 미래지향적이고 성숙한 관계 발전을 위해, 3.1운동 100주년이던 지난 2019년에 이어 '한국을 사랑한 일본 기독교인들'을 소개한다.

▲오다 나라지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 연설을 하고 있다. ⓒCGN
▲오다 나라지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 연설을 하고 있다. ⓒCGN 

일본 기독교계, 신사참배 타협
조선인까지 일본 신에 절한다?
모세의 십계명 어기는 일 명백

"저도 한 사람의 일본인이기 때문에, 만약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신사참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 민족의 보물이고 일본인만 신봉해야 할 신들입니다. 일본인이 아닌 조선 민족의 경건한 영혼을 가진 여러분이 일본 민족의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 하물며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야훼의 신 외에 어떤 것도 신으로 모시고 기도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1937년 늦가을 평양 숭실전문학교 대강당. 재작년 가을 평안남도 야스다케 다다오 지사는 도내 공·사립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해 개회에 앞서 평양신사 참배를 참석자 전원에게 명령했다. 이를 거부한 숭실전문학교는 폐교당했고, 그 폐교된 학교 대강당에서 오다 나라지(織田楢次)는 1천여 명의 조선인 성도 앞에서 닷새 동안 일본 신들의 유래와 우상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오다 나라지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교리까지 바꿔 신사참배에 타협한 일본 기독교계는 스스로 천황신에게 엎드려 우리 기독교의 신을 버린 것과 다름없다"며 "일본인이라면 몰라도, 조선인 여러분까지 일본 민족의 신에게 절하는 것은 명백히 모세의 십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그런 것은 죄도,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야훼 외의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죄 중에서도 대죄"라고 역설했다.

▲영화 <무명 無名> 중 오다 나라지 선교사의 모습. ⓒCGN
▲영화 <무명 無名> 중 오다 나라지 선교사의 모습. ⓒCGN 

사죄하는 마음으로 조선 입국
조선인처럼 살며 조선인 위해
정복 일본인, 피정복자 조선인
전도 불가, 철저히 조선인으로

오다 나라지는 올해 6월 25일 개봉한 영화 <무명 無名>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지금 일본은 조선에 많은 죄를 짓고 있다. 사죄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 한다"며 1928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으로 건너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조선인처럼 살면서 조선인들을 위해 살아갔다.

영화에서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그의 행적은 지난해 7월 발간된 『조선전도자 오다 나라지』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재일교포 2세 유대하 작가가 오다 나라지의 탄생 100주년인 2008년 탈고한 소설이지만, 작가는 1977년 일본기독교단 출판국(日本基督教団 出版局)에서 간행된 조선·한국인 전도 기록 『지게꾼(チゲックノ)』을 바탕으로 한, '사실에 가까운 픽션'이다.

유대하 작가는 저자 후기에서 "젊었을 때 만난 오다 나라지는 이미 70세 가까운 사람 좋은 할아버지 같은 분이었고, 한국명 전영복(田永福)을 자처한 소설 속 주인공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며 "막 출간된 자서전 『지게꾼』을 선물받았는데, 서명과 함께 한글과 히브리어로 된 '사랑 전부'의 헌사도 받았다. '사랑'이야말로 예수 가르침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임을 깊이 시사하며 제 삶의 좌우명이 됐다"고 적었다.

그가 정한 한국 이름 전영복의 '전'(田)은 입(口) 안에 십자가(十)가 들어 있어 '말씀을 전하는 사명자', 이름 '영복(永福)'은 '영원한 복'을 뜻한다.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승려의 길을 위해 수행에 매진했지만 깨달음이 없어 번뇌했고, 중학교 졸업 후 노상전도 모습을 보고 흥미를 느껴 전도관에 발을 디뎠다 세례를 받고 전도자가 됐다.

▲영화 <무명 無名> 중 오다 나라지 선교사의 모습. ⓒCGN
▲영화 <무명 無名> 중 오다 나라지 선교사의 모습. ⓒCGN 

당시 동네에서 핍박당하던 조선인들을 보고 조선에서 전도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해 광주 일본인 교회를 찾아갔지만, 일본인 성도들만 모이고 조선인들을 전도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한다. 그러나 정복자인 일본인이 피정복자인 조선인을 전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함을 듣게 됐고, 철저히 조선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무일푼으로 24일 만에 경성(서울)까지 걸어서 당도한 오다 나라지는, 일본 목회자들이 가지 않는 한반도 평양 너머 북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총독부로부터 선교자금을 받고 근본 교리까지 바꿔가며 조선 민족을 일본 민족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에 발 담그고 있던 조합교회의 전도 방침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

"인류 보편의 구제가 응축된 십자가(十子架)는 무력한 지금의 나에게는 무거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가(支架·음식물을 들어 나르는 데 쓰는 들것처럼 생긴 도구)를 짊어지고 조선 사람들에게 걸리는 불합리한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러 가자."

▲영화 <무명 無名> 중 오다 나라지 선교사가 ‘전도 마차’를 끌고 순회 전도하던 모습. ⓒCGN
▲영화 <무명 無名> 중 오다 나라지 선교사가 '전도 마차'를 끌고 순회 전도하던 모습. ⓒCGN 

전도하다 붙잡혀 여러 차례 고문
수원 노리마츠 선교사 따라 사역
신학교 졸업 후 최대 빈민굴 개척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추방당해

추위와 배고픔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때로는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의 오해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1년 동안 광부로 지내기도 했고, '자연인'처럼 3개월 동안 살았던 동굴이 알고 보니 '호랑이굴'이어서 '신의 보호와 기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의 '진심'은 조금씩 알려졌고, 조금씩 조선인들을 섬길 기회가 찾아왔다.

전도 마차를 만들어 함경북도 마을들을 순회하며 전도하다 일본인 순사에게 붙잡혀 심문을 당했다. 다른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그에게는 개종 압박이 닷새 밤낮 동안 이어졌지만 끝까지 견뎌내며 다짐했다. "억지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고통받은 자가 아니라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일본 형사들은 그를 '진정한 예수쟁이'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조선인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몸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일본인으로서의 우월감'을 점검하고, 조선 민족 영혼의 아픔'을 직시하며 근성과 무지를 단련하기 위해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오다 나라지 목사의 실제 모습. ⓒCGN
▲오다 나라지 목사의 실제 모습. ⓒCGN 

그러다 찾은 곳이 수원. 영화 <무명 無名>에서 최초 개신교 선교사 노리마츠 마사야스 목사(乘松雅休, 1863-1921)가 앞서 복음을 전했던 고장이다. 그곳에서 노리마츠 선교사 전도로 세례를 받고 목사가 된 박 씨를 만나, 장호원과 충주, 대동과 안촌, 음성과 앵촌, 평안까지 다니며 노리마쓰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도 했다.

이후 주변의 권유로 목사 안수를 위해 신학교 입학을 결정, 다시 경성을 찾아 홀리네스교회 성경학원(현 서울신대)에서 2년간 공부하고 경성 최대 빈민굴이 있던 서대문 밖 천연동(天然洞)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전쟁이 본격 시작되며 강제징용과 함께 신사참배 요구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숭실전문학교에서 5일간의 연설 후 그는 결국 경찰에 붙잡혔다. 잠시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자, 사흘 동안의 고문이 시작됐다.

▲오다 나라지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 연설 모습. ⓒCGN
▲오다 나라지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 연설 모습. ⓒCGN 

"제가 조선인을 걱정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말뿐만이 아닙니다. 딱히 일본인을 싫어하고 조선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간에 조선인이나 일본인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신은 사랑의 신이고 약자의 신이며 민족이나 국가의 벽을 무너뜨린 인류 보편의 신이거든요."

다시는 조선에서 전도하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쓰면 풀어주겠다는 검사의 협박을 거부한 그는 결국 풀려난 후 강제로 조선을 떠나야 했다. 추방당한 그는 도쿄 일본신학교(현 도쿄신학대학)에 입학했고, 방학을 이용해 슬그머니 조선에 들어와 신사참배에 이의를 제기하며 교회들을 방문했다 돌아가곤 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끌려와 고문당하던 오다 나라지 선교사. ⓒCGN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끌려와 고문당하던 오다 나라지 선교사. ⓒCGN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일본에 돌아가서도 조선을 잊지 못했다. 1941년 신학교 졸업 후 재일교포들이 모인 아라카와구(荒川區) 미카와시마(三河島) 교회에 부임해 일본 내 조선인교회들과 적극 관계를 맺고, 인근 교토·나고야·오사카 방면 80여 조선인 교회들과 연대를 강화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일본기독교단에서 분리된 조선인교회들이 독립해 '재일본조선인기독교연합회(현 재일대한기독교회총회)'라는 교단으로 재출발할 때 나라지도 함께했다. 그는 조선인 교단에 몸을 두고, 조선인 친구들과 평생 친분을 이어갔다.

▲노리마츠 마사야스, 오다 나라지 선교사의 실제 모습. ⓒCGN
▲노리마츠 마사야스, 오다 나라지 선교사의 실제 모습. ⓒCGN 

이후에도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아왔지만,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제자들을 격려하고 작은 교회들을 섬기다 돌아갔다. 한국 정부가 표창을 수여하려 했으나, "세상에서 상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못 받는다"며 사양했다. 1980년 소천받았을 때,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재일 한국인 성도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그의 묘비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다 나라지의 생애를 조명했던 영화 <무명 無名> 유진주 PD는 제작 동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한국과 일본을 이웃으로 두신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접어두고 결국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한일 관계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영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