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를 빼면, 복음은 왜곡되고 협소해져
지난 4월 21일, 씨드교회 권혁빈 목사는 "하나님이 세상을” (요한복음 3:16)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에 대해서 전하며, 구원을 내면적 변화로 축소해서 보면, 복음이 편협한 개념이 되고 왜곡된다고 경계했다. 또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구도 속에서 복음과 크리스천의 삶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크리스천은 무엇을 가장 잘 해야 할까?
권혁빈 목사는 안식년에 코리안 다이아스포라 네트워크 모임이 있어서 태국을 방문했을 때 일화를나누며, 크리스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일정을 다 마치고 마지막 하루 쉬는 날이 있어서 다같이 바닷가에 갔다. 저는 물놀이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물놀이를 별로 안 좋아하는 몇몇 분들이 그냥 혼자 앉아 있으니, ‘저쪽에 가면 사격장이 있으니까 사격을 하러 가세요’라고 하셔서 저는 별로 취미도 없고 해본 적도 없는데 혼자 있기 뭐해서 따라갔다. 근데 저만 과녁에 여덟 개를 맞췄고 나머지 분들은 과녁을 맞춘 개 몇 개 안 됐다. 그래서 내려오면서 제가 사격 신동이라는 소리도 듣고 그런데 저는 사실 잘하고 싶은 건 사격이 아니라 설교를 잘하고 싶다.”
“크리천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무엇을 가장 잘 알아야 하고 또 무엇을 가장 잘해야 할까?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복음을 가장 잘 알아야 한다.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이 형성되고, 우리 삶이 온전하고 건강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권 목사는, “복음이란 죄와 사망에서 우리가 해방되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영원한 형벌에서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라며, “이 복음의 메시지가 가장 집약돼 있는 성경 구절” 이라며, 요 3:16을 살펴보았다.
복음을 이해하는 두 키워드: 거듭남,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장 3절)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는 복음을 이해하는키워드이다. 거듭남은,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우리 안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만 얘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신다. 구원과 하나님 나라, 사실은 이 두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사실 한 가지이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건강한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잘 연결이 되어 있는가’, ‘구원의 의미 속에 하나님 나라가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권 목사는, “개인 구원의 믿음을 넘어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나의 구원을 통해서 이 세상 가운데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함께 질문해야 된다”며, 내면적 변화로만 구원을 이해하는 것을 경계했다.
개인의 구원, 죽어서 가는 천국만 이야기한다면 반쪽짜리 복음
“우리에게 어떤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 나의 개인적인 문제나 해결하고 마음에 평안을 주고, 죽은 다음에 천국 갈 수 있게 해주는 개념만으로만 복음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반쪽짜리 복음이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 이 두 가지가 사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복음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마가복음 1장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현실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산상수훈에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시고, 주기도문에서도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고’ 라고 하신다. 또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에게 임하였다’라고 표현하신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말씀, 성경의 의미를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몇 가지로 살펴보자.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주권의 개념, 통치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지만 아직 완전하게 완성되지는 않았으며 종말에 가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크리스천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오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마치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갈 때, 아직 목적지인 한국에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한국적인 것을 부분적으로 경험하는 것과 유사하다. 한국행 비행기에서는 안내 방송도 한국말로 나오고 음식도 한국 음식이 나오고 한국 승무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미래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이다.”
“또 하나님 나라를 내면적인 것 또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나에게 임했다라고 하면, 그 주권이 나에게만 영향력이 미치고, 여기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주권은 내 가정과 직장, 내가 속한 공동체, 우리 교회와 교회의 담을 넘어서 세상 가운데 흘러가며, 개인적인 영역보다도 훨씬 더 넓게 그 현실적으로 역사하는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내면적 개념’ 즉 좁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 결국 복음은 내 삶을 통해서 더 큰 구원의 현실, 즉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된다.”
우리는 모두 천국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단과 소설의 배경을 설명하며 이것 소설의 구도를 통해 크리스천의 삶의 의미를 해석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라는 책의 첫 문단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계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소설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쓰여졌다.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시대,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지만, 동시에 인간의 죄악과 폭력과 분노, 이런 것들이 표출되었던 시기였다. 이 문단의 마지막에 이렇게 써 있다. ‘우리는 모두 천국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즉, 혁명을 일으킨 자들은 절대군주, 권위주의가 무너진 좋은 세상을 기대했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자들도 혁명의 대상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이 소설은 이러한 총체적인 사회적 난국, 유혈이 낭자한 시대, 그 속에서 소망을 찾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쓰여졌다. 이 프랑스 혁명의 잔혹한 분위기 속에서,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한 이야기를 이 소설은 풀어나간다. 이 소설에는 프랑스 귀족 출신 찰스, 그의 연인인 루시, 시드니라는 변호사가 등장하는데 루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한 변호사 시드니는,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 찰스를 감옥에서 내보내고, 자신이 대신 감옥에 남는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한 선물을 주는 이야기이다.”
“찰스 디킨스는 과연 이 이야기를 통해서 뭘 얘기하고자 했을까. 당시의 사회를 보면서, 사회의 부조리, 인간의 악함을 보면서 디킨스는 이 조그만 사건, 한 사람의 구원의 사건을 이 시대 속를 향한 소망의 메시지로 얘기하고 있다.저는 이 이야기 구도 속에서 복음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의 삶을 생각해 본다. 시대가 악하고 소망이 없는 거 같지만 복음을 가진 한 사람이 이 시대에 소망의 이야기로 불을 붙이고 것과 같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분이 생각이 났다. 하버드를 나와서 월가에서 들어가 부유한 삶을 사셨던 분이다. 이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분이 어릴 때 예수를 믿고, 부모님께서 예수를 잘 믿어서 이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할 뿐 하나님의 시각을 갖지 못한다. 이분에게는 발달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딸이 있다. 어느날 인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고, ‘돈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월가를 떠나 선교사가 되어야 겠다’라고 결심하고 선교사 준비를 했다. 그런데 딸을 키우다 보니까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선교사가 되는 대신 주변에 소외된 사람을 돌보자라는 마음에 홈리스 사역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딸의 장애를 보고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면 ‘우리 가정의 어떤 고난인 비극인가?’라고 생각한다. 우리 신앙은 나의 개인의 삶에서 해석이 안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장애를 가진 딸이 있지만 이것이 그냥 우리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을 더 느끼고 더 바라보고 그들을 위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하나님의 뜻이구나, 라는 하나님의 시선을 갖게 되셨다. 우리가 가진 복음, 내가 받은 구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제거한다면, 그 구원은 편협하고 왜곡된 개념이 되고 만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같은 이해를 가져야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한 사람의 구원이 결코 한 사람의 개인의 변화로 머물지 않고 파급력과 영향력이 있음을 이야기하며, 씨드교회의 사명을 재확인했다.
“여러분의 믿음을 물려받은 여러분의 자녀 중에 절망적인이 시대 가운데 소망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룰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실 것이라고 믿는다. 한 사람의 구원은 결코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위해서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간다. 씨드교회가 하고 있는 일도,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 다 연결되어 있다.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면 세상 속에서 예배가 시작된다. 여러분은 세상 속 선교사이다. 우리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나라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자라면 그 복음 위에 우리가 서 있고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어떤 분야든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복음을 내면으로 축소시키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복음이 단지 우리 교회 안에 머물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 운동이 될 수 없다. 오늘 내 삶이 그 복음의 한 부분이 되어서 그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아름답게 확장시키는 그런 선하고 아름다운 도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