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며, “내가 이제 간을 맞출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눈에 무슨 거미줄이 보인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이 노령에 따르는 증상의 시작인 것을 저는 잘 몰랐습니다.
얼마 전 도미니카 공화국의 선교지에 들렀다가 독감에 걸렸습니다. 열대지방에서 감기에 걸리는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미국에 복귀하자마자, 코로나 검사를 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3년 중에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던 저이지만, 혹 주변에 민폐가 될까 봐 속히 검사했습니다. 다행히 음성 반응이 나왔습니다. 거의 한 달 동안의 독감으로 후각 상실이 왔습니다.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셔도 전혀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문득 부모님의 하소연이 생각났습니다. 그 안타까움이 이제야 느껴지고, 늦게나마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과 연민이 내면으로부터 차올랐습니다.
압살롬의 시대에 다윗에게 목숨을 바치기까지 섬겼던 부자, 바르실래가 생각났습니다. 다윗이 반역자를 물리치고 그에게 “궁궐에 들어가서 같이 살자”고 청할 때, 그는 대답합니다.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까”(삼 19:35). 그는 왕의 호의를 돌려 아들 김함에게 배려를 부탁합니다. 바르실래는 고령으로 감각이 점차 약화, 상실되었으니, 부모의 무덤을 지키리라고 다윗을 설득합니다.
나이 듦에 대하여,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목회하면서 깊이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시간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는 명제입니다. 많은 성도를 돌아볼 때, 육체의 기능이 점차 약화, 상실되지만,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신앙 인격이나 영적 기능은 계속 고양될 수 있다고 소망을 가져봅니다.
노령의 증상, 곧 기력 저하와 쇠약해짐을 반전시키려고, 규칙적인 생활과 적당한 운동을 통해 삶의 활력을 도모합니다. 저도 후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는데, 제 발로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습니다. 후각을 회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는 없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건강하게 목회하면서 살았던 저이지만, 이제 우리 몸도 조금씩 수선하면서 살아야 하는 엄혹한 현실에 미소를 지으며 수납합니다.
아마 미래에 정신이나 신체의 기능이 한창 젊었을 때의 수준을 되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건강만을 제 남은 삶의 목표로 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을 앞두고 부활 이후 신체적 완성의 소망을 바라봅니다. 나의 오감(五感), 곧 시각, 청각과 후각, 미각과 촉각이 완벽하게 회복됨을 믿으며 안도감을 가집니다. 이제 “안경을 벗겠구나, 잠자리와 벌새의 날개 치는 소리까지 듣겠구나, 사과의 냄새와 맛을 즐기며 오렌지 동산의 향기에 취하리라, 개울가 닥터피쉬의 간지럼을 느끼며,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노래하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물론 소시민적 회복을 훨씬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총체적 구원은 우리의 영육 간의 새로움은 물론이고, 하나님 관계와 인간관계를 바꿀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완벽한 권위, 능력과 지혜를 직접 누릴 때, 우리의 눈물이 씻겨질 것입니다. 그렇게 찰거머리같이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던 죄의 소욕과 오류(誤謬, faults)가 흩어져 사라질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온전함, 사람의 공동체가 더 이상 서로 경쟁하지 않고 섬기는 새 에덴,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건강한 가족이 되어 서로 섬기게 될 새 예루살렘이 우리 부활의 미래일 것입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KCMUSA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