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고 싶은 옷, 어울리는 옷
여호수아 16장 1절-4절, 17장 14절-18절
옷을 잘 입는 사람들을 패셔니스타(Fashionista)라고 부른다. 반면에 옷을 잘 못 입는 사람들을 패션 테러리스트(Fashion Terrorist)라고 부른다.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 사람들은 패션 테러리스트가 될 확율이 높다. 패셔니스타가 되려면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이 아니라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럼 자기에게 어울리는 색깔과 스타일이 뭔지를 알고 입어야 한다. 그런데 저는 그걸 몰라서 평생 어우리지 않는 옷만 입는 패션 테러리스트로 살았다. 그런데 제 아내를 만나서 구원 받았다.
우리 신앙에도 이런 현상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난 뒤에 땅분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요셉 지파는 자기들이 분배 받은 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4절을 보자.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요셉 지파가 생각할 때 자기들은 지파의 크기에 비해서 땅을 너무 작게 분배 받았다고 느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땅을 충분히 분배 받지 못해서 속상하다는 말이다.
누구나 불공정한 대우는 받으면 속상하게 된다. 속상할 때는 공감해주고, 위로를 해줘야 그 사람이 마음이 풀린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요셉지파가 속상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15절을 보자.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여호수아가 요셉지파에게 땅이 작다고 느끼면 산지를 개척하라고 한다.
그러자 요셉 지파는 자기들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그것이 쉽지 않다고 말을 했다. 16절을 보자.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적들에게 철병거가 있어서 산지를 개척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의 말을 공감해주지도 않았고, 처한 상황을 이해해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17절과 18절을 보자. “17.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아무리 이야기 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요셉지파가 얼마나 답답했겠냐? 벽에 대고 이야기 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왜 이렇게 요셉지파가 하는 말을 하나도 받아주지 않았을까? 요셉지파를 차별하는 것 아닌가? 참고로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에 속하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다. 그러니까 차별했다고 볼 수 없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한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요셉지파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한다. 요셉지파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은 12지파 중에 요셉지파라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요셉의 아들이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를 합쳐서 통상적으로 요셉지파라고 불렀다.
원래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야곱이 낳은 12명의 아들들이 각각 지파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12지파를 구성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레위지파를 따로 구별해서 떼어내면서 그 한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 빈 한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요셉의 두 아들이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넣어서 그 숫자를 채운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12지파에 이름을 올릴 수 없는 서열이었다.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낳은 아들들이다. 어머니가 이집트인이라는 약점도 안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12지파에 들어 왔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이 두 아들을 엄청 축복했다. 말하자면 부모 덕을 많이 본 지파이다. 그럼 이들에게는 누구보다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요셉 지파가 하는 말을 다시 들어보자. 14절을 보자.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요셉지파는 큰 민족인 것이 사실이다. 유다지파의 인구수는 76,500명이었다. 그런데 요셉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합하면 85,000이었다. 하나님이 이들을 축복해주신 것이 틀리지 않다.
그런데 그들의 말투 속에서 뭐가 느껴지는가? 자기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특권의식이 느껴진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큰 민족이 되었으면 더 큰 믿음의 도전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자기들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대우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요셉지파의 말대로 자신들이 분배 받은 땅이 정말 작았던 것일까? 여호수아 16장 1절-4절에 보면, 요셉지파에게 분배된 땅이 나온다.<지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엄청나게 큰 땅을 분배 받았다. 그리고 가나안 땅 중에서 가장 중심부에 있는 땅을 대부분 다 차지했다. 우리가 잘 아는 세겜, 길갈, 실로, 벧엘 등 중요한 땅들이 다 요셉지파에게 분배되었다.
그런데 왜 요셉지파는 자기들에게 분배된 땅이 작다고 불평했을까? 요셉 자손들의 말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6절을 보자.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자신들이 분배 받은 땅이 작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차지한 땅이 작았던 것이다. 자기가 분배 받은 땅을 점령하면 충분히 많을 땅을 차지할 수 있는데, 철병거를 가진 적들이 무서워서 점령을 못한 것이다. 힘들이지 않아도 되고, 믿음의 도전을 하지 않아도 차지할 수 있는 편하고 쉬운 땅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이다.
요셉 지파가 진짜 큰 지파이고, 하나님이 복을 받은 지파라면 자기들의 크기와 영향력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요셉지파는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옷이 아니라 자기들이 입고 싶은 옷을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요셉 지파에게 너희 지파의 크기와 영향력에 맞는 옷을 입으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17절과 18절을 보자. "17.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정과 위로 그리고 적절한 칭찬이다. 사람이 아무리 가난해도 가난 때문에 죽지는 안는다고 한다. 또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죽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적절한 인정과 칭찬을 받지 못하면 죽는다고 한다.
요셉지파도 자기들을 인정하고 칭찬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축복 받아서 큰 지파가 된 것을 인정해주고 칭찬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요셉지파에게 어떤 인정과 칭찬을 해주어야 맞는 것일까? 이들이 원하는대로 정복하기 쉬운 땅을 다 주는 것이 인정해 주는 것일까? 어려운 것은 피해버리고, 쉬운 것만 선택하고 살아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이 너를 여전히 사랑해 주시고 복주신다고 말해줘야 할까?
요셉 족속이 여러분의 자녀들이라면 어떤 말로 인정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겠는가? 어떤 말을 해줘야 진정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일까?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오늘 여호수아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요셉 자손들을 인정하고, 칭찬하고, 위로하고 있다.
인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권리에 대한 인정이다. 두번째 능력에 대한 칭찬이다. 여호수아는 이 두 가지를 다 했다. 첫번째,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17절) 여호수아가 요셉 자손들에게 당신들은 큰 민족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두번째,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8절) 요셉 지파의 능력을 칭찬해준 것이다.
지금,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들에게 최고의 인정과 칭찬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이런 인정과 칭찬이 왜 요셉 지파 속에서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할까? 요셉 자손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지 않고, 자기들이 입고 싶은 옷을 입으려고 고집했기 때문이다.
요셉지파는 원래 이런 지파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하나님의 축복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지파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도전하고 싸운 지파였다. 믿음으로 도전하는 야성이 있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셔서 내가 큰 민족이 되었다."(14절) 말 속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요셉지파는 야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이 말씀을 붙들고 싸워서 하나님께 복을 받고, 큰 지파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축복을 받은 그 이후이다. 더 이상 도전하고 하나님을 뜻을 성취하는 것에 그 야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을 인정해주지 않고 대접해주지 않는 것에 야성이 나왔다. 섭섭하고, 분노가 나오고, 거칠어 졌다. 믿음으로 통제되지 않는 야성이 튀어나왔다. 믿음으로 통제 되지 않는 야성을 우리 인생을 망치고 다른 사람들도 해치게 된다.
그런데 이 야성이 통제되고, 훈련되어서 영성으로 바뀌면 사람을 살리는 가장 강력한 파워가 된다. 우리의 고집도 야성이 될 때에는 사람을 죽인다. 한번 미워하면 죽을 때까지 미워한다. 그런데 이것이 영성이 되어서 사람 살리는 것에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문제와 끝까지 싸워서 이기겠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리며 기도하겠다. 내가 저 사람 구원할 때까지 기도하겠다. 내가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져서라도 저 영혼 살리겠다가 되는 것이다.
요셉자손은 자신들을 대접해 주지 않는 것에 분노 하기 보다는 왜 자기 지파들의 모습이 그렇게 되었는 지를 분노해야 한다. 요셉자손은 자신의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속상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파의 미래가 막혀 버린 것에 대해서 슬퍼해야 했다. 이것이 야성을 넘어서 영성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왜 나를 대접해주지 않는 지를 속상한 것을 넘어서, 왜 나는 저런 사람을 품지 못하는가를 속상해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관심가져 주고 챙겨주지 않은 것을 속상해 하기 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챙기지 못하는 것을 속상해 해야 한다. 이기적인 내 모습을 보고 속상하고, 속좁은 내 모습을 보고 속상해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부족한 나를 고쳐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우리가 야성이 죽고 영성이 개발된다. 나를 통해서 한 영혼이라도 살아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불평하고, 속좁게 굴고,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면 참 슬프지 않을까?
실제로 요셉지파(에브라임지파)가 계속해서 다른 지파를 해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삿8: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삿12:1) 에브라임 지파는 다른 지파를 도울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런데 지파들이 도와 달라고 부탁할 때에는 나몰라라 하고 있다가, 싸움에서 이겨서 전리품을 나눌 때가 되니까 나타나서 왜 나를 안 불렀냐고 싸우겠다고 시비를 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기가 가진 힘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앞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벗고, 내게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내 이기심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야성들을 길들여서 영성으로 자리잡게 해야 한다. 통제되지 않는 야생마를 길들여서 최고의 말인 종마를 만들듯이 우리의 야성을 길들여서 최고의 영성으로 길러내야 한다. 험담하는 나를 길들여서 칭찬하는 사람으로 만들라. 남들을 미워하는 나를 길들여서 사랑하고 위로하는 나로 만들어라. 내것만 챙기는 나를 길여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나로 만들어라. 나의 욕구를 위해서 미친듯이 달리는 야생마같은 나를 길들여서 하나님을 위해서 청춘을 바치는 인생으로 만들어라.
우리의 기쁨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소리 듣고, 칭찬듣고, 대우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어 가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진짜 기쁨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말씀과 복음 밖에 없다. 내 육신의 귀로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통해서는 속사람이 강건케 되지 않는다. 귀에 듣기에 좋은 소리는 우리를 더 자기 중심적으로 만들고, 욕구 중심적으로 만든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6-19) 복음과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적용하면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내게 말씀하시는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이 우리 속에 가치관으로 자리잡고, 능력으로 자리잡아서 모든 문제와 사건을 복음과 말씀으로 반응하게 되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앞에 자신의 내어 놓고 하나님이 고치시고 치료하시길 기도하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고치신다. 내가 입고 싶은 것을 주장하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옷을 입고 능력으로 사는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