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전화의 탄생은 실의와 고민 끝에 자살 직전에 걸려온 한통의 전화 때문이였습니다. 한 목사가 심야에 경청한 전화의 메아리가 온 세계에 퍼져서 생명의 절규를 진지하게 듣고 질의하게 됐다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가치를 재 발견한 쾌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매체로 보편화되어 현대인이 즐겨 쓰고 있는 "전화" 앞에다 "생명의" 라는 소유격을 붙여 준 "생명의전화"는 현대의 문화적 편의성과 생명의 가치를 다이나믹하게 연결시킨 생동감 있는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전화가 가지고 있는 편의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 전화가 가지고 있는 편의성은 시간과 공간을 압축시킨 즉시성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걸 수 있다는 즉시성은 전화가 가지고 있는 우선적인 장점입니다.
* 전화가 가지고 있는 편의성은 익명성입니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쾌적한 삶의 가치는 불필요한 관계를 가급적이면 차단하고 필요 불가결한 관계만을 최소한으로 살려 놓으려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쾌적추구의 현대생활은 친숙한 관계가 아니면 무개 있는 대화를 시도할 필요성조차도 느낄 수 없게 합니다. 이 선별적인 인관관계는 자기 개방 보다는 자기 방어를 앞세우게 되고 부담감이 없는 한도 내에서 만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게한다.
전화는 이러한 자기 방어와 선별적인 인관관계의 두터운 문을 부담없이 뚫을 수 있는 익명성의 무기를 제공해 줍니다. 곧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내 보이지 않고도 간단하게 자신의 필요나 감정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현대인이 좋아하는 익명의 울타리를 뚫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입니다.
* 전화가 가지고 있는 편의성은 보편성입니다. 특히 상담이라는 스펙트럼에서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의 정신적 내면 구조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프로이드 이래 상담적 치료를 골고루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었다. 누구나 정신적 치료술의 혜택을 골고루 받도록 하려는 시도에도 아직도 여러 방면에서 제한적인 면이 많은데 그러나 전화는 지식의 유무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문명의 이기이기 때문에 전화를 통한 상담의 보편화 내지 대중화를 가속시켰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전화의 편의성 때문에 생명의전화는 동포사회에 많은 호웅과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 특히 낮 설고 물설고 말이 선 타국에 정착하면서 다 인종 다 문화 사회에서 겪게 되는 이질문화의 부적응과 언어소통의 어려움으로 오는 외부적인 고통과 전통적인 가정형태의 생활이 변화된 데서 오는 내부적인 절망과 위기의 아픔이 적절한 돌팔 구를 찾지 못하고 누적되면 외향적으로는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고 내면적으로는 자살충동으로 이어지든지 정신적 질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처럼 사회변화에서 오는 아픔과 슬픔을 전화를 통하여 손쉽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주변 사정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내향적인 수줍음으로 다져진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적절한 돌팔 구가 되고 있습니다.
* 상담에 의한 치료가 내향적인 자기 보호막 때문에 서구문화권 보다 여러모로 불리한 문화적 여건 속에서 이토록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이 기다리고 바라던 대화의 통로로 뿌리를 잘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생명의전화는 한국인의 정신적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필요한 표현방법을 적극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사회변화에 따른 인간적 요청과 절대적 필요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 이처럼 귀한 사역임에도 교회나 한인사회의 무관심으로 경제적 열세로 늘 현상유지에 전전긍긍하느라 널리 홍보나 광고에 미약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사반세기인 25년이란 기간을 온신을 다해 동포들을 섬겨왔으나 아직 생명의전화의 존재와 사역을 알지 못하는 동포들이 많아 동포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안타까운 사건을 막지 못한 아픔이 큽니다.
* 고민과 고독 갈등과 위기와 자살 등 삶의 복잡한 문제에 빠져있는 동포들에게 전화상담을 통하여 경청하고 공감하고 수용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었건 만 작년 3월달에 LA근교에서 발생한 목회자로 부름을 받고 교회를 섬기던 50대의 정 전도사 가정의 동반자살사건의 비극을 대하며 저희들은 이와 유사한 수많은 사연을 상담해 왔었지만 이 같은 불행을 막기 위해 부름 받고 헌신해온 저희들은 큰 충격으로 주저앉을 뻔 하였고 부끄럽고 당황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넘어 충격과 가책과 무력감을 격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우리 상담원과 진지하고 깊은 고뇌의 상담이 이루어 졌더라면 이런 가슴 아픈 불행한 사건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고 안타까움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며 365일 년중무휴로 밤을 지키는 저희들의 헌신이 무색하게 하는 이번 사건은 이럴 때 너는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었느냐고 질타하는 것만 같습니다.
한인사회에는 새벽부터 밤 까지 수많은 설교와 찬송과 기도의 함성이 넘치고 있는데 그 많은 기도와 설교가 죽음으로 내려가는 절박한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우리의 형제를 붙잡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충격과 아픔이 그럴 때 관심어린 손길로 그를 붙잡아 줄 이웃은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크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수 많은 목회자의 설교를 한 순간에 무력화 시키는 것과도 같아 무력감에 깊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실로 크리스천의 자살은 영혼을 구하려는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 땅 끝까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전체의 기독교의 문제이자 영혼을 돌보는 목회의 문제가 아닐까고 생각하게 합니다.
크리스천의 자살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목회적 돌봄에도 일정부분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자살에 대하여 심각성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정신건강과 관련하여 우울증과 자살문제에 이르기 까지 자살을 단순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만 치부해 그 책임을 벗어나려는 구차한 노력을 중단하고 과감하게 그에 따른 이해와 아울러 대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가 된 것임을 생각해서 동포사회의 안녕과 아픈 상처를 싸매어 주기위해 헌신하는 기관에 깊은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