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겉옷을 가죽띠로 질끈 묶어 입고 메뚜기와 석청(石淸)을 먹으며 살았다. 그의 외모와 삶의 방식이 엘리야를 연상시켰다. 외모만 보아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그의 외침이 유대광야에 울려 퍼졌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
여리고로 내려가는 언덕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메마른 광야가 동편으로 비스듬히 펼쳐 내려간다. 예루살렘에서 요단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유대광야이다. 언덕 위에는 바위 그늘도 없다. 샘물도 없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너무 심해서 돌이라는 돌은 모조리 부스러졌다. 누가 그곳을 찾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광야로 보내셨다. 인생에 실패와 기근이 덮쳐 오면 길은 광야가 된다. 거기는 시기하며 질투할 사람도 없고 원망하며 다툴 사람도 없다. 광야는 혼자 걷는 길이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정리 정돈할 수 있는 곳이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시면 회개하고 돌아서기에 딱 좋은 곳이다.
광야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이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회개의 눈물은 사막의 오아시스보다 더 귀하고 보배롭다. 요한은 그들을 데리고 요단 강으로 내려가 세례를 주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다. 스스로 죄 없다는 바리새인들도 내려오고, ‘인생살이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사두개인들도 찾아왔다.
요한은 그들의 굳은 마음을 광야의 조약돌처럼 부스러뜨렸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 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7-10).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 예수님도 요한이 외치는 말을 들으셨을까? 듣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1-12).
사명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길을 잘못 드는 법이 없다. 후회도 없다.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요한의 사명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이었다. 회개는 바른 길을 벗어난 사람이 제 길로 돌아서는 행위이다. 상실했던 목표를 다시 회복하는 결단이다. 이런 결단과 행동이 없다면 회개가 아니고 후회다. 요한은 회개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게 했다.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분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알곡이 되든지 쭉정이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다. 요한은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위대한 소리’였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물 가운데로 들어가셨다. 그 순간, 예수님을 보고 놀란 요한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
나이까?”(3:14)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 먼 친척이긴 하지만 과연 그 둘은 서로 알고 지냈을까? 알 길이 없다. 설사 요한이 예수님을 알고 지냈더라도 그분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세례 요한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 1:3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