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에는 원인이 있다
여호수아 7장 1절-13절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라는 말이 있다. 소포모어 슬럼프(sophomore slump)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학교 2학년이 되면 신입생 시절에 비해 공부에 대한 열의가 떨어지고 성적이 부진해지면서 방황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스포츠에서는 대뷔 첫해에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선수들이 그 다음 해에 스럼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현상을 말한다.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가 여호수아에게도 나타났다. 여리고성에 대승을 거둔 여호수아는 승리의 기세를 몰아서 그 다음 성읍인 아이성을 공격했다.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작아서 쉽게 이길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전쟁다운 전쟁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아이 성 사람들에게 쫓겨서 허급지급 도망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인 36명이 희생 당했다.
전쟁을 하다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 그리고 전쟁에서 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패배했어도 전열을 정비해서 다시 전쟁을 하면 된다. 여호수아에게는 60만의 대군이 있다. 여호수아는 40년 동안 전쟁을 한 경험이 있다. 한번 졌더라도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기면 된다. 3천명 보내서 안되면 1만병 보내면 되고, 1만명 보내서 안되면 10만명 보내면 된다. 이것이 전쟁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수아가 아이성 패배 이후에 더 이상 전쟁을 못하겠다고 한다. 여호수아의 마음에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심겨져 버렸다. 5절에 보면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5절)라고 한다. 6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패배의 충격으로 할 말을 잃고 저녁때까지 멍하니 있었다.(6절)
이것을 슬럼프 또는 무기력이라고 한다. 슬럼프는 마음이 두려움에 패배 당한 상태를 말한다. 슬럼프는 실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몸도 다친 것도 아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마음이 쪼그라 들어서 몸과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 상태다. 운동선수에게 이런 두려움이 생기면 초등학생도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못하고 실수를 한다. 가장 기본적인 패스도 할 수 없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이 생기면 공포감 때문에 무대에 설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낀 공포감이 8절-9절에 나온다. “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적들에게 알려지면 당장이라도 7개 부족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자신을 덮쳐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서 더 이상 전쟁하기가 두려웠다.
여호수아의 마음이 얼마나 쪼그라 들어버렸는지 7절에 나온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이것이 전쟁의 영웅인 여호수아가 한 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했던 사람이다. 하나님이 큰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요단강을 건넜다. 여리고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하는가? 차라리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요단강 동쪽 편에서 만족하고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자신감이 얼마나 부질 없는지를 볼 수 있다. 일이 잘 되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고, 돈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고, 성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신 만만해 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것들이다. 돈이 있고, 능력이 있고, 하는 일이 잘된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말라.
어느 누구도 실패와 슬럼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실패하기 싫고, 슬럼프에 빠지기 싫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잘 될 때에는 내 인생에 실패나 어려움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러다가 예기치도 않은 순간에 두려움이 찾아와서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든다. 정말 사소한 일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도 한다.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가? 라는 질문도 중요한데, 어떻게 하면 슬럼프를 잘 극복할 수 있는 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한 것이다.
슬럼프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문제의 정확한 진단이다. 대부분의 실패들은 문제를 잘 진단하는 것만으로도 그 문제의 80-90 프센트가 해결된다. 좋은 의사란 환자를 보고 그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사람이다. 진단을 잘못하면 아무리 좋은 약을 처방해도 소용이 없다.
여호수아의 실패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전술의 실패였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공격하기 전에 정탐꾼들을 보내어서 정보를 수집했다. 정탐꾼들은 2-3천명 만 보내도 함락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했다.(3절) 그래서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이 말한 최대치인 3천명을 보냈다.(4절)
그런데 이 정탐 정보가 잘못된 것이었다. 아이성 백성들은 남여 합쳐서 1만 2천명이 넘었다.(수8:25) 그러면 그 중에 싸울 수 있는 군인들은 5천 명이 족히 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성은 성벽이 아주 높게 쌓인 요새였다. 그렇다면 성을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방어하는 군인에 비해서 3배에서 5배는 되어야 한다. 아이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최소한 이만 명은 넘게 보냈어야 했다. 여호수아가 정탐군들의 말만 듣고 3천명만 올려보낸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이 실수는 여리고성 승리로 인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3절을 보자.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정탐군들의 이야기 속에서 거만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자기들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양 자만심을 부리고 있다. 여리고성 승리의 기분에 도취되어서 냉철한 판단력을 상실해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정탐군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소수니… 수고롭게 마소서.”(3절) 이럴 때에 지도자인 여호수아라도 중심을 잡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태도를 바로 잡아 줬어야 했는데, 여호수아도 승리의 기분에 도취되어서 중심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교만한 마음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판단력을 떨어지게 만든다.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작은 성이 맞다. 그런데 그 인구가 약 1만 2천명이나 된다. 그런데 2-3천명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눈이 가려진 것이다. 판단력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 마음에 교만과 자만심이 찾아오는 순간 이미 눈이 가려지고, 판단력이 상실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삼상15:17)
교만한 마음이 아이성 패배의 원인의 전부일까? 모든 패배에는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1절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리고성 전투 때 이미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을 챙기는 범죄를 저질렀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간의 범죄를 해결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 승리를 허락하실 생각이 없으셨다. 13절을 보자.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전략을 잘 짜고, 3천명의 몇 배가 되는 군대를 보냈어도 아이성 전투에서는 패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첫번째 패배를 한 뒤에 더 많은 군대를 보냈더라도 역시 패했을 것이다. 아간의 범죄가 승리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의 원인을 모른 상태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인생에서 문제는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안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 외에 진짜 중요한 문제가 숨겨졌다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문제와 고통이 계속해서 생기는 것은 그것을 깨달으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신호이다.
이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아무도 몰랐던 아간의 범죄 사실이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드러났다. 10절-11절을 보자. “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문제를 드러내신다. 우리를 죄를 드러내신다. 우리는 문제와 사건을 가지고 반드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진짜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문제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해결할 방법을 말씀해 주셨다. 14절-15절을 보자. “14. 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15.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다음 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모든 백성들이 모여서 제비를 뽑았다. 유다지파가 뽑혔고, 유다지파 중에는 세라족속이 뽑혔다. 이렇게 계속 제비를 뽑다 보니 최종적으로 아간이 뽑혔다. 그리고 아간이 시날산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덩어리 오십 세겔을 숨긴 사실이 드러났다. 아간의 가족들을 아골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돌로 쳐서 죽이고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16절-25절)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문제가 해결되었다. 26절을 보자.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범죄한 사람을 찾아서 처벌해야 우리 공동체가 축복받는 다는 것일까? 잘잘못을 따져서 판단하고 정죄하고 고소하라는 말인가? 의로운 사람 의롭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라는 말인가?
아간의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는지 보여준다. 죄가 우리 인생과 공동체에 속에 영적인 흐름을 막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막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마18:15-17) 죄를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하신다. 아간의 죄를 드러내고, 제비를 뽑히게 한 분이 누구신가?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할 위치에 서 있지 않다. 백성들은 아간에게 비난을 쏟고 욕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봐야할 시간이다.
다른 사람의 죄가 아무리 커보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보다 크지 않다.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3-5) 다른 사람의 잘못이 보이면 나에게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잘못이 보이면 그것을 통해서 내 죄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된다.
아간만 죽으면 다 끝난 것일까? 아간에게 모든 책임을 다 돌리고 비난만 하면 되는 것인가?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보아야 했다. 3절과 4절을 보자. “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정탐꾼들이 아이성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2-3천명만 보내면 된다고 잘못 보고 했다고 해서 여호수아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2천명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3천명을 보냈기 때문에 잘한 일인가?
3절과 4절 사이에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여호수아는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물어야 했다. 그런데 여호수아도 교만한 마음에, 자만심에 빠져서 묻지 않았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가장 큰 잘못이다. 하나님께 물었다면 3천명으로는 아이성을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을 것이다. 자만심에 우쭐해 있는 자기를 보게 해주셨을 것이다. 교만함으로 우둔해진 생각을 바로 잡아 주셨을 것이다. 아간의 범죄 때문에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려주셨을 것이다. 기도하고, 하나님께 묻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여호수아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음을 회개했을 것이고, 교만하고 자만한 것에 대해서 회개했을 것이다.
우리가 성공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면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다. 성공하고 승리할 때에는 기뻐한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 그런데 그 다음은 하나님은 사라지고 자기가 그 일을 이룬 것처럼 교만이 생기고 자만심이 찾아온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 성공과 목표를 위해서 도움을 주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성공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면 내가 할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필요치 않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왕과 주인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성공할 때 더 두렵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더 하나님 앞에 무릎꿇게 된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실패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제대로 깨달았다. 그 다음 전투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아이성 전투가 가나안 땅 전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으로 패배한 전투이다. 우리 인생이 모든 순간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