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안 돼 vs 하나님 공의 실현
사형제 폐지 명분 입증된 적 없어
범죄자보다, 피해자 인권 존중을
중범죄 원초적 저항감 고취 유효
소년범 증가, 사형 부담에도 원인
드라마 인민재판식 사형은 안 돼
◈사형제 존치의 의의: 인권, 존엄성, 그리고 범죄예방을 위한 형벌
사형 언도와 집행의 정당성 이슈는 현대 사법체계의 주요 아포리아(aporia·그리스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난제와 모순을 뜻하는 철학 용어- 편집자 주)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사형의 언도 및 집행을 포기하는 국가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보인다.
우리 한국을 비롯해 사형제를 사실상 폐지한 국가들이 내놓는 명분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제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라도 그 생명의 존엄성은 존중하자는 것, 그리고 사형제를 계속 시행해 봤자 사형 혹은 그에 비등한 형벌을 받을만한 강력범죄 건수가 두드러지게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전자의 명분, 즉 범죄자라도 인권과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말해 부당한 명분이다. 범죄자가 흉악 강력범죄를 통해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할 책임을 전적으로 저버린 경우, 인간 존엄성의 우선순위는 피해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범죄자와 피해자 둘 모두 존엄성이 있다면, 먼저 범죄자 측에서 서로의 존엄성을 존중할 의무를 저버렸기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므로 피해자 인권을 무조건적으로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형제나 그에 준하는 중형(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등)은, 사법체계가 적절하게 운용된다는 전제 하에서는 지극히 적법하고 정당한 징계의 방편이다. 사형 폐지를 옹호하는 이들이 사형제를 순전한 감정적 복수라며 폄훼하는 것과 달리, 사형제 혹은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같은 중형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평등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사형제 폐지의 두 번째 명분, 즉 사형제를 지속해도 흉악 강력범죄 건수가 유의미하게 감소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겉보기에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범죄예방 효과가 없는데 굳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단지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폭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형제의 범죄예방 효과를 살피려면 단순히 강력 흉악범죄 발생 건수만을 볼 것이 아니라, 사형제가 범죄 충동을 막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내막을 세부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사형제가 세간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을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사형제의 범죄예방 효과는 아직 명확하게 입증된 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형제가 유의미한 수준의 범죄예방 효과를 갖지 못한다는 주장 역시 확고하게 입증된 적 없다는 점이다. 즉 사형제의 범죄예방 효과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고한 경험적 근거를 가진 정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흉악 강력범죄를 촉발하거나 억제하는 요인에는 사형제 외에도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형제라는 변수 하나만으로 중범죄가 효과적으로 예방되는지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형 집행과 강력범죄 발생 건수의 수치상 상관관계만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사형제 존치가 사회 전반에 주는 직관적이고 실제적인 심리적 영향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약 2주 전 각 교정기관의 사형 집행시설 점검을 지시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 사형 집행을 위한 예비작업은 아닌지 세간의 관심을 모은 소식이다. ⓒSBS 캡처 |
◈사형제 존치의 필요성: 하나님의 공의의 그림자인 사형제
사형이 정상적으로 집행되는 국가에서는 강력범죄에 대한 통상적 이미지가 대단히 무겁고 암울하게 각인된다. 사형제가 폐지된 곳에서는 살인 등 강력범죄가 피해자의 억울함에 결부된 공분만 불러일으키지만, 사형이나 그에 준하는 중형이 엄정하게 내려지는 곳에서는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지극히 절망적이고 수치스러운 형태로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뇌리에 남게 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심을 자극하고, 여기에 더해 모든 이로부터 지탄받으며 불명예로 가득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에 대한 극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이 사형제의 부정할 수 없는 심리적 영향이다.
사형을 당할 이가 느끼고 감내해야 할 비참하고 절망적인 죽음의 방식에 대한 느낌은 중범죄를 비롯한 모든 범죄행위 자체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며, 공권력과 사회의 질서에 대한 순응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실제로 현재 한국의 중장년층은 1997년(한국에서 사형이 마지막으로 집행된 해) 이전까지 범죄와 관련된 이런 무거운 느낌을 체감할 수 있는 사회를 살아본 경험이 있다. 반면 1990년대 태어난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해 공권력의 권위나 형벌체계에 대한 중압감이 훨씬 덜한 세상을 살아왔다.
2000년대 이후 소년범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그 범죄 양상이 이전에 비해 훨씬 비열하고 잔혹해진 것, 그리고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하는 이 젊은 세대에서 기형적인 형태의 강력범죄가 빈발하는 것에는 사형제가 주는 심리적 무게감과 부담감이 사라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1995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년범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한국의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된다. 이 사형 집행시설은 많은 범죄자들에게 근원적인 저항감과 공포심을 일으켰으며, 세간에서는 범죄자가 맞이하는 최후의 비참함을 각인시키기도 하였다. ⓒ픽사베이 |
이처럼 사형제 그 자체는 인권과 존엄성의 원칙에도 부합하고, 중범죄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감을 고취시키는 데도 유효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사형 판결 및 집행과 관련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바로 잘못된 수사와 재판으로 억울하게 중형을 받게 되는 이들의 문제이다.
특히 우리 한국에서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 사형제가 정권의 부조리함과 불의에 저항하던 이들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쓰인 적이 있다. 그리고 경찰 수사력이 아직 온전하지 않았던 시절, 억울하게 범죄자로 몰려 사형이나 그에 준하는 중형을 받는 사례도 빈발하곤 했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혐의가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는 일부 사례에 대해 사형을 언도하거나 집행하는 것이 지극히 부당하다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 부당한 사례들이 사형제 자체의 정당성과 의의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다만 사형 언도와 집행에 있어서 얼마나 만전을 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가령 <국민사형투표>에 묘사된 인민재판 식의 사형은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방식은 오히려 사형제의 본의(本意)를 훼손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불투명하게 처리되는 요인이 있어서도 안 된다.
다행히 독재정권 종료 이후 한국 사법부는 사형을 언도하는 데 따르는 막중한 사회적·윤리적 책임을 절감하고 있다. 현재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은 모두 그 혐의가 부정할 수 없이 명백하게 밝혀진 이들이다. 이런 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을 무기한으로 미루고 있는 것은 사회적 공의와 효용, 양편 모두에 저해되는 처사이다.
기독교인은 기본적으로 이 사회에 엄정한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죄인에 대한 용서와 사랑의 의무가 있기는 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릴 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중세 말 신학자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원칙적으로 무한히 자유롭게 자신의 권세를 행사하시지만(potentia dei absoluta),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그 권세를 스스로 제한해서 사용하신다(potentia dei ordinata).
이 땅의 법질서는 보다 상위의 공의, 즉 하나님의 공의를 유비하는 그림자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이 땅의 공의가 올바르게 세워져야 하나님의 계명의 절대성과 엄준함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 땅의 공의가 형편없이 무너진 상황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공의에 대한 감각을 갖기란 쉽지 않다. 법질서가 무너진 땅에 복음화가 막히고 교회 존속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사형투표>는 사형제에 결부된 공의에 대한 물음에 관심을 갖게 한다. 물론 작품의 상업성을 높이기 위해 사형 집행에 얽혀 있는 복수심과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과도하게 자극한다는 점에서 문제제기의 진정성이 다소 퇴색되는 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명백하게 죽어 마땅한 이들을 적법하게 처단하는 일이 세간에 어떤 심리적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 새겨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다.
그리고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왜 사형제가 성경적으로 정당한지 하나님의 공의를 바탕으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사형투표>의 인민재판 방식은 결코 제대로 된 사형의 방식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적법하고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통해 명백하게 혐의가 밝혀진 강력 흉악범죄자에 대한 사형 집행이라면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 ⓒSBS 캡처 |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