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선교사이자 연세대 설립자인 원두우 박사 손자
향년 96세를 일기로 지난 6월 25일 소천
불꽃 열정 ‘제2의 고국’ 한국을 미국보다 더 사랑한 믿음의 가문
원득한(리처드 언더우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이 지난 달 25일 오전 10시에 미국 일리노이 어바나시에 소재한 자택에서 심부전으로 소천했다. 향년 96세. 장례식은 현지시간 8일(토) 오후 1시, 샴페인-어바나한인교회 (담임목사 함종헌)에서 엄수됐다.
특별히 미국 교회가 아닌,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에서 천국환송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리처드 언더우드가 소천하기 이틀 전 샴페인-어바한인교회 함종헌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가문이 한국을 미국보다 사랑했기에 함종헌 목사에게 장례식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천국환송예배는 리처드 언더우드 장로의 가족, 친지, 동료 외에도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 전교인이 참여하여 축제와 같이 진행됐다. 이날 예배는 리처드 언더우드 가족, 친지의 추모의 시간을 통해 고인의 행적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시간으로 시작됐다. 함종헌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 51 - 58절을 본문으로, ‘부활 안에 있는 믿음’라는 제하의 설교 말씀을 통해 “리처드 언더우드 장로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은 주 안에 우리도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라면서 “우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을 믿으며 우리도 믿음 생활 가운데 승리하자”고 유가족들과 참석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
천국 환송예배 후 유가족, 참석자들은 샴페인-어바나한인교회 Korean Mission Center에 모여 고인의 삶을 추모하는 리셉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한국 선교의 선구자인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와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1851-1921)의 손자이자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와 에델 반 왜건 언더우드의 아들인 리처드(딕) 언더우드의 유족으로는 아내 캐롤 러츠 언더우드, 4명의 자녀 프레더릭, 마릴린, 데이비드, 엘리자베스, 그리고 손자 9명, 증손녀 1명, 여동생 그레이스 언더우드 하크니스가 있다.
1927년 한국의 서울에서 출생한 리처드 언더우드는, 그의 어머니가 1912년에 초대 선생님이었던, 그리고 그가 이후 경력의 대부분을 보낸 학교인 서울 외국인 학교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한국어 구사 능력과 성품을 형성 시켜준 곳은 연세대학교의 캠퍼스 근처의 연희 마을이었다. 1942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송환된 그는 브루클린의 아델피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해밀턴 칼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컬럼비아와 럿거스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리처드 언더우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와 한국 전쟁 동안에 미 육군 전략국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서 복무했다. 그는 한국 전쟁을 끝낸 휴전 회담 동안 통역관으로 그의 큰 형 호레이스와 함께 근무 하여 Bronze (Oak Leaf Cluster)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그는 미국 한국 재단(America Korea Foundation)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이후 미국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며1961년에 서울 외국인 학교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1992년 학교장을 은퇴하고 미국 일리노이주 어바나로 거처를 옮기며 지역 사회와 교회에서 활동했으며 샴페인-어바나 한인 교회 고문으로 활동했다. 남편, 아버지, 교육자,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딕은 한국과 미국에서 사랑받는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척박한 현실 가운데 실망과 좌절보다는 오히려 열정을 다해 조선의 교육과 의료사업을 위해 헌신했던 언더우드 가문. 특히 4대에 걸쳐 한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며, 교육 의료 정치 및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한국의 근대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기사 및 사진 제공: 미국 일리노이 어바나 =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