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신앙의 자유가 합법화 되고 제도화된 나라에서는 그 교회 조직과 모든 활동이 그 나라의 교회 역사로 기록이 되고 공적 활동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북한의 지하교회인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신앙의 실체와 활동과 그 조직을 공개할 수 없고 조직 간에 연계성도 불투명하여 한정된 그 자체 조직으로만 은밀하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한계성을 갖고 있다.

 

북한은 세계에서도 가장 폐쇄성이 강하고 신앙 활동을 불법적으로 판단하기에 개인의 신앙뿐만 아니라 그 조직의 활동도 일체 비밀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불원간에 통일의 시대가 도래된다면 비로소 교회사가 정립될 수 있기에 그때까지는 잠정적인 교회 역사로 중간사라는 교회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의 기록도 신약과 구약 간에 시대적 빈 공간이 400여 년 동안 존재해 있기에 그 시기를 '중간사'라고 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묵시가 선지자들에게 없었기에 '암흑기'라고도 한다. 현재의 북한교회의 기록과 행적을 현실적으로 공개할 수도 없고 통일된 후에나 전국적인 전수조사에 의한 자료를 근거로 연구되고 밝혀내어야 만이 그제야 정식 교회사로 기록되게 될 것이다.

단지 현재의 북한 교회 역사는 1953년 이후 공식적으로 모든 자료가 집산되거나 정리된 것이 없기에 부분적인 자료를 표본화(sampling data)통해서만 북한의 지하교회 역사를 분석하고 이를 근거로 그들의 신앙과 부분적인 행적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제한성을 갖고 있다.

과거 개신교의 역사에서도 종교개혁(1517) 이후 교회의 모든 기득권과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처절한 교회의 쟁투와 저항의 역사에서 개신교가 그 나라와 교황청으로부터 합법적 공교회와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기 전까지는 사실상 개신교의 역사도 구체화된 역사성이 입증되지 않았다. 그 당시 개신교는 불법 이단 교회로 단죄되었기에 개신교회의 신앙과 교회 활동은 그 당시에 공적으로 인정되고 공식화되지 못했다. 그같은 수백 년의 종교 개혁기에 개신교 교회 역사도 중간사적으로 지속되어 오다가 종교의 자유를 쟁취한 후에나 공교회의 역사로 인정되고 편입되었다. 그러한 대표적 교회 역사를 영국의 성공회와 청교도, 독일의 천주교와 루터파, 프랑스의 천주교와 위그노파, 체코의 천주교와 모라비안파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유럽의 개신 교회들은 처절한 종교 전쟁을 치루면서도 신앙의 자유 실현과 예배를 드리기 위해 토굴로, 광야로, 산중으로 도피하여 성도의 신앙을 사수하다, 훗날에는 공교회의 지위를 합법적으로 누리게 되어 고난의 역사를 교회사로 정립하게 되었다. 그 중에 가장 상징적 교회가 프랑스의 위그노교도였다.

이들은 독일 루터파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았으며 약 200여 년의 불과 같은 극렬한 연단을 받았다. 위그노파들은 장 칼뱅의 복음적 교리에 충실한 경건파들로서 그들의 손에는 프랑스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들렸고 칼뱅의 직업소명론과 노동과 자본 신성론과 평등과 자유와 근면을 강조한 새로운 교리에 적극 반응하면서 새로운 교파로 형성되었다. 그 공동체는 평범한 시민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점차 왕족들과 지식층과 각 분야의 기술자인 장인들도 위그노파에 속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 당시에 나염, 방직, 제철, 시계, 금융, 제지, 의술, 군사 등의 산업 인재들이었다.

철저히 카돌릭 국가인 프랑스에서는 왕권 유지와 종교 기득권 수호를 위해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1523년 종교 개혁에 참여한 한 사제가 화형에 처해지면서 종교개혁의 운동이 점차 확산되자, 프랑스 내에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격화되어 8차에 걸친 내전과 그로인한 대량 학살이 1572년에 바돌로매 축일에 일어나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 후 루이 14세는 프랑스 전역에 공예배와 개인의 성경 읽기 금지와 교회당이 불태워졌고 목사와 신자들이 화형에 처해지고 고문과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에 불복한 남자 성도들은 배젓는 노예로 팔려갔고 대부분의 농노들은 강제로 카톨릭으로 전향시켜 의무적으로 미사에 참석시켰다.

이러한 핍박이 지속되자 많은 위그노들이 영국과 네덜란드와 스위스와 심지어는 남아공과 미국 사우스캐롤나이나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프랑스 국내에 남은 교도들은 고산지대나 토굴에서 예배와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에 대해 정부에서는 '광야 기독교인', '밤도깨비교도'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였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온전한 공적 예배를 드리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환난과 핍박과 순교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이들의 신앙과 교회 활동은 그 당시에는 묻히고 거부당하였으나, 오늘 날에는 프랑스와 세계 교회 역사에 정사로 기록되었다.

마침내 프랑스 국민의회에서는 프랑스 시민혁명(1789~1894)을 겪은 후에야 그 나라의 200여년 만에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어 더 이상의 핍박은 없었다. 그러나 정부로부터의 공식 인정된 교회는 아니었다가 약 100여 년이 지난 후, 1907년에야 위그노파 개신교회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합법적 교회로 승인받았다. 이처럼 위그노교회는 약 400여 년의 처절한 중간사(암흑기)를 통과해 교회의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약 300여 년 동안 박해를 받다가 기원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밀라노칙령'을 내림으로 기독교 성도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과도 같은 역사였다.

현재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70여 년 동안 고난의 역사와 프랑스 위그노교도들의 200여 년의 고난의 역사는 그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때로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보게 된다. 이북 지역의 공산화로 인한 북한 지하교회의 핍박 역사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반드시 종식되고 새 시대를 맞이하는 그날이 올 것이며 중간사라는 교회 역사도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