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이 사회에서 젠더(gender)라는 용어가 익숙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흔히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때 주로 섹스(sex)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이젠 젠더라는 용어로 대치되고 있다. 이 생소한 용어는 본디 문법적 용어였다. 예를 들어서 독일어는 명사를 남성명사, 여성명사, 중성명사로 나눈다. 남성명사는 der(데어)라는 정관사를 붙이고, 여성명사에는 die(디)를, 중성명사에는 das(다스)를 붙여서 명사에 성(gender)을 구분한다. 그래서 독일어는 단어를 외울 때, 그 앞에 있는 관사의 성을 같이 외워야 한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남성 관사와 함께 'der Vater'(데어 바터), '어머니'이라는 단어는 여성 관사와 함께 'die Mutter'(디 무터)라고 외워야 한다. 이것을 Grammatical Gender(문법적 성)라고 한다. 여기서 gender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이 용어는 이제 사회적 성(社會的 性)으로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단어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네오-막시즘은 인간의 생물학적 성에 해당하는 Sex를 '젠더'로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용어 혼란을 통해 인간의 성 정체성을 해체하려는 해체주의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젠더 이데올로기와 실존주의
여기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개념을 간단히 이해하고 넘어가자. 실존주의란 쉽게 말해서 사물이 존재하는 그 본질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인간이 스스로 규정한 의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서 한 여자가 강에 돌을 던졌다. 그 여자가 무슨 이유로 강에 돌을 던졌는지는 그 여자 외에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한 남자가 그 여자의 행동에 대해 자기 맘대로 해석한다. 그 여자가 강에 돌을 던진 것은 누군가를 상상하고 죽이고 싶다는 충동의 행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맞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녀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녀에게 물어보면 그 행동의 '본질'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존주의자들은 그녀가 어떤 의도로 강에 돌을 던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했느냐가 중요할 뿐이라고 한다. 참과 거짓은 그녀의 의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식했느냐일 뿐이라는 말이다. 참과 거짓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개념이다.
이것을 젠더 이데올로기 관점으로 이해해보자.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으로 사람을 오로지 남자와 여자로만 창조하셨다. 이것이 '본질'이다. 그런데 젠더 이데올로기로 사람을 보면 인간이 남성이나 여성으로 태어난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단지 내가 내 자신을 남성으로 보는가, 여성으로 보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창조주가 내 육체를 남성으로 창조했느냐, 여성으로 창조했느냐에 굴복할 필요는 없다. 단지 내가 스스로 규정한 성 정체성(실존)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육체를 맞추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트렌스젠더(trance gender)다.
이런 논리는 사스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에 기인한다. 이런 사르트르의 사고방식을 실천에 옮긴 여성이 바로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유명한 '시몬 드 보브아르'(Simone de Beauvoir)다. 그녀는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함으로써 급진적인 성 해방의 모델이 됐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여자는 여자로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 했다.(김영한,「젠더주의 도전과 기독교 신앙」,(두란노,2018),p.36.) 생물학적 성이 여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교육한 성역할이 여성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
여기서 우리 기독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문제의식만 가진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식은 각성의 시작이며, 각성한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가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남성성(혹은 남성다움)과 여성성(여성다움)이라는 개념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차원부터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주셨다. 남자라고 해서 남성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라고 여성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났어도 여성성이 있고,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났어도 남성성은 있다. 이 젠더의 비율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남녀 모두가 이 둘을 공유한다.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갖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주셨는가? 그 이유는 남녀가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남자 안에 남성성만 있으면 여자를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여자 안에 여성성만 있으면 남자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남성과 여성은 공유할 수 없는 속성 속에, 공유할 수 있는 속성이 있으므로 서로 연합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젠더가 균형 잡히게 될 때, 그 사람은 가정과 사회에서 건강한 인간관계를 할 수 있게 된다.
가정에서 젠더가 형성되는 방식
그러면 이 젠더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는 건강한 부모의 양육을 통해 주어진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통해 남성성이라는 성 역할(젠더)을 배우고, 어머니를 통해서 여성성이라는 성 역할(젠더)을 배운다. 남자아이는 아버지의 성역할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를 통한 성 역할도 필요하다. 이 둘을 통해 각 개인에 내재되어 있는 젠더가 균형을 잡는다.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젠더의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건강하지 못한 가정에서 나온다는 것으로 쉽게 입증된다.
그러므로 젠더를 이데올로기화하는 네오-막시즘은 불행한 가정사로 몸살을 겪는 세대들을 선동 대상으로 삼는다. 양부모를 통해 건강한 성 역할(gender)를 배우지 못한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왜곡된 젠더를 심어준다. 왜곡된 젠더를 심어주기 위해 빌헬름 라이히가 사용하는 "자연스런 성 해방"을 선언한다.(김영한,「젠더주의 도전과 기독교 신앙」,(두란노,2018),p.31.) 여기에는 생물학적 성 역할을 서로 바꾸어서 쾌락을 즐기도록 독려한다. 여기서 동성애, 양성애, 혼음, 수음, 근친상간 등이 나온다. 이렇게 영혼을 철저히 파괴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Sex(성)과 인간이 스스로 규정한 성(geder)을 분열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sex/본질)을 인간이 스스로 규정한 성(gender/실존)으로 바꿀 수 있다는 교만의 절정을 향해 간다.
젠더 회복을 위한 유일한 대안, '십자가'
이런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길은 가정의 회복이다. 기독교 가정부터 성경적인 가정을 회복해야 한다. 성경적 가정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의 실존을 철저히 부정하는 십자가다. 단순히 프로그램으로 될 문제가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부모의 성 역할을 위해 부모부터 말씀이라는 본질 앞에 자신의 실존을 부인해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런 신앙의 태도를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고, 그다음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본질에 자신의 실존을 부인하고 맞추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만일 부모 가운데 한 부모만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4)고 했다. 또 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는 아버지의 신앙 영향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고 한 말씀처럼 부모 가운데 한 분만 경건을 유지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젠더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기 때문이다(딤전 4:5).
젠더 이데올로기의 도전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서 이길 유일한 무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 가정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뿐이다. 우리가 만일 십자가를 기뻐한다면 이 전쟁의 승리는 머지않아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