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놀이한다 고로 존재한다
핥아 먹는 사회
강자를 넘어뜨리는 힘, 리듬
오를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모순의 계단
나중 된 알파와 먼저 된 오메가
오징어 게임 속 기독교 놀이
종말의 리듬
▲세계적 열풍을 부르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
놀이 이론
19세기 놀이 이론의 거장 호이징아(Johan Huizinga)는 말하기를 "형식적인 측면에서 놀이란 일상 밖 허구 행위에 불과하지만, 그 놀이의 수행자를 지배할 수 있는 자유로운 행위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이 정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바로 이와 같은 놀이 이념을 축으로 전개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놀이란 모종의 실제적 가치가 결여된 패러다임이지만, 그것이 시공간을 장악하고 들어올 때 사람들은 정해진 규칙에 기꺼이 자신을 집어 던져 넣는다. 그러고는 비밀로 감싼 모종의 역할 행위를 통해 일상 세계와의 단절을 꾀하는 집단의 관계를 형성한다.
<오징어 게임>은 이런 허구 행위와 자유로운 행위를 오가며 지배받는 인간상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드라마이다. 호이징아는 이런 인간상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ce)'로 규정하였는데 루덴스는 "나는 놀이한다"라는 뜻의 라틴어 Ludent에서 온 말이다. 한마디로 "나는 놀이한다. 고로 존재한다"인 셈이다.
▲참가자 456명이 처음 모여 게임에 대한 설명을 듣는 모습. |
"나는 놀지 않아요. 놀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 어떤 가치 있는 노동 행위 또는 고상한 사색에 임한다 하더라도 놀이에 지배되지 않는다면, 그의 환경은 서서히 지옥으로 변해갈 것이다.
삶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놀이 요소가 결여된다면, 그 자체로써 이미 불행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이념으로 구사하는 이와 같은 놀이의 지배력, 그리고 그 힘의 원천에 관해 논해보려 한다.
총 6개의 놀이가 이 드라마에서 그런 구조를 이룬다.
1.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우리말로 옮기면 놀이이다. 놀이는 '뛴다'에서 유래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놀람'이 '뛴다'라는 뜻을 가진 '놀'과 '나다'(out)의 합성어라는 쓰임새에서 볼 때 놀이는 확실히 '뛴다'에서 비롯된 말로 보인다.
게임이란 말 역시 스포츠를 뜻하는 고대 북유럽어 gaman에서 온 말이며, 게임의 다른 말 play 역시 '빠르게 움직인다'는 뜻의 plagian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려하면, 확실히 놀이란 쉬는 행위가 아니라 부단히 동작하고 움직이는 행위라는 기의(signifié)로써 동서양 구분 없는 기호로 통한다. 노는 게 노는 게 아니란 소리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그런 놀이로서의 첫 단계이다. 술래가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라는 문장을 큰 소리로 읊는다. 그러면 우리 독자 대부분도 어린 시절 이 놀이의 규칙을 알다시피, 놀이 참가자는 문장의 길이(장단)에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다.
그 문장의 장단에서 벗어나 술래에게 걸리면, 어릴 때 우리는 "죽었네!"라는 표현을 썼다. 이 드라마에서는 정말로 "죽는다." 술래가 시작하고 끝맺는 이 길이의 문장에서 벗어나다가, 술래 눈에 띄는 날이면 그 자리에서 무참히 죽는다.
▲첫 번째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게임의 성격 자체를 알지 못해 허둥대던 참가자 수백 명이 학살당한다. |
인간의 생명이 놀이의 대상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비판한 영화 <설국열차> <기생충> 아류를 잇는다. 그렇지만 아류와는 다른 차원의 시도가 돋보여 참신하다.
마치 상급 객실 칸에 서식하는 평양시민을 위해 하급 객실 칸의 인민을 연료로 때 가면서(감독은 열차의 무한동력이 핵융합봉이었다고 둘러댔지만) 질주하는 설국열차처럼 비틀어 짜지도 않고, 기생충에서 풍겼던 습하고 역한 냄새도 이 드라마에는 없다. 산뜻하고 경쾌한 분위기로 짜여 있다.
그런 참신한 분위기는 놀이라는 규칙에 충실하여, 극상의 놀이 참가자들뿐 아니라 관객에게 역시 자유로운 참여를 기치로 내세운다. 강요란 있을 수 없다. 다만,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리듬에서 벗어나면 죽을 뿐이다.
이 리듬 놀이가 그 모든 놀이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놀이이다.
2. 단 것은 핥는 것 - 설탕 뽑기
두 번째 게임은 '설탕 뽑기'다. 수백 명에 달하는 놀이 참가자의 공통점은 최악의 경제 난민이라는 점이다.
사채로 신체 포기각서를 쓴 사람, 동네에서 가장 똑똑한 우등생이었지만 투자 실패로 쫓기는 신세가 된 펀드 매니저, 의료사고로 재기 불능에 빠져 장기 적출이나 일삼는 의사, 조폭이었지만 경제적 궁지에 몰린 깡패, 신앙으로 가장한 이중적 인격에 함몰된 기독교인..., 하나 같이 자본 사회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다.
▲두 번째 게임 '설탕 뽑기'에서 주인공 기훈이 효과적인 '뽑기'의 방도를 발견하고 있다. |
'설탕 뽑기' 게임은 자본의 이런 부정적 속성을 잘 표지하고 드러낸다. 판형의 정해진 모양을 따내는 도구는 오로지 바늘 하나.
긁는 도구로 쓰는 이 바늘을 어떤 사람은 침을 발라 활용하고 어떤 사람은 불로 달구어 활용하지만, 주인공 기훈은 가장 탁월한 방도를 생각해낸다. 핥는 것이다.
핥는 행위야말로 설탕, 즉 단 것의 속성에 관한 본질을 꿰뚫는 행위이다. 단 것은 씹거나 삼키는 용도가 아니다. 언제나 단맛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단 것을 그토록 오랜 세월 핥아온 듯하다.
'설탕 뽑기' 놀이의 단계는 이처럼 현실의 단면에 새겨진 속성을 드러내 일깨우며 마친다. 핥은 자는 모두 살아남은 것이다.
이 핥는 리듬 다음은 힘의 리듬이다.
3. 힘센 자들을 넘어뜨리는 리듬 - 줄다리기
세 번째 게임은 '줄다리기'. 단체 게임이다. 힘센 팀으로 구성해야만 살아남는다. 어느새 힘센 자들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다.
약자는 누구도 끼워주지 않는다. 약자들만이 모여(사실은 남겨져) 한 팀을 이루었다. 도저히 힘센 팀을 이길 방도는 없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세 번째 게임 '줄다리기'의 거대한 세트. |
이기는 방도는 단 하나, 힘센 자들의 힘을 이용하는 기술이다. 약자 모두가 동일한 자세 동일한 타이밍에 맞춤으로써 저항력을 극대화해, 잠시 힘센 자들을 당혹케 한다. 그러고는 균열된 힘의 틈새를 곧바로 공략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언제까지나 그들의 힘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때 지탱하던 힘을 다같이 일시에 놓아버린다. 그러면 힘센 자들의 뭉친 힘은 일시에 붕괴한다. 그 순간, 비로소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일시에 다시 당겨 승리를 거둔다.
밀고 당기는 이 힘의 리듬, 다음은 모순의 리듬이다.
4. 소중한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모순의 계단 - 구슬치기
매 게임의 장소로 줄을 지어 리듬에 맞추어 이동하는 광경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기하학적인 계단형 이동 통로는 마치 마우리츠 코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상승과 하강>이라는 판화 작품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에셔의 <상승과 하강>. |
에셔의 이 석판화 도상은 일군의 수도사들이 한 줄로 줄을 이어 계단을 올라가고 다른 한 줄의 수도사들은 내려가는 구도이다. 하지만 이들은 올라가도 올라가는 게 아니다. 또한 내려가도 내려가는 게 아니다.
에셔는 동시대 수학자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가 고안한 존재 불가능한 입체도형을 주로 자기 판화의 소재로 삼은 판화가이다. 3차원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구조를 2차원 평면에서 존재 가능한 구조로 바꿔 보여주는 것이 이들의 특기이다.
이번 놀이의 단계는 모든 게임을 통틀어 가장 모순된 상황에 직면하도록 만드는 놀이이다. 살벌한 생존의 상황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딛고 올라가야만 상승하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놀이의 형식은 자유, 다만 두 사람이 짝을 지어야 한다. 어떤 놀이가 주어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참가자들은 가장 마음이 맞는 사람으로 선택한 상태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부, 험악한 삶에 부대끼며 살다 이제야 새롭게 친구로 만난 두 소녀, 그리고 가장 나약한 노인과 깊은 우정의 짝을 맺은 주인공 기훈.
게임은 다름 아닌 구슬치기, 형식은 자유이지만 단 둘이 하는 이 게임의 패자는 죽음이다. 결국 가장 의지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이 게임의 결과이다.
소중한 친구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짝도 있고, 착하고 순수한 짝에게 사기를 쳐서 죽음으로 내몬 짝도 있고...,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양심을 속여 소중한 친구를 밟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려는 주인공 기훈이 있다.
▲에셔의 석판화 <상승과 하강>을 닮은 이동 통로. |
이런 비극의 상황은 영락없는 에셔의 <상승과 하강>의 도상에 나타난 리듬이다. 올라서도 오를 수 없는 모순의 계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려가도 내려가지지 않는 모순의 리듬을 지닌 계단이기 때문이다.
모순의 리듬을 지나 이제 뒤바뀐 리듬의 단계이다.
5.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리듬 - 함정 건너가기
그 다음 기다리고 있는 다섯 번째 게임은 순번이 중요하다. 게임 시작 전 자신이 순번을 택해야 한다. 놀이 참가자는 모두 머뭇거린다. 앞번호가 유리할지 뒷번호가 유리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 주저할 때 누군가 먼저 순번을 집어들자, 그제서야 앞다투어 일제히 유리한 순번을 잡으려고 재빠르게 움직인다. 대부분이 중간 번호를 선호한다. 게임 속에서 어떤 위험이 닥치든, 그나마 대응할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간의 순번이 모두 동나고 가장 앞 순번과 가장 뒤 순번만 남는다. 극과 극이다. 가장 유리한 순번이거나 가장 불리한 순번이거나.
▲순번을 정한 참가자들이 게임의 룰을 듣고서 망연자실해 있다. |
주인공 기훈은 가장 처음 순번을 선택한다. 바로 그 순간 남은 한 사람이 애절하게 간청한다. 평생토록 주관 없이 살았기 때문에, 한 번은 그렇지 않은 선택을 하고 싶다는 속사정을 토로한다. 남을 위한 배려로 언제나 영악하지 못해 주저함이 많던 기훈은 양보를 하고 만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가장 불리하거나 아니면 가장 유리한 순번이 된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참가자를 기다리고 있는 게임은 함정 건너기. 건너는 요령은 오로지 하나, 앞서가는 사람이 떨어져 죽는 것을 보고서야, 그 발판이 함정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이리하여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리듬을 갖고, 먼저 된 자는 먼저 된 자기 리듬을 내주고 마친다.
6. 비극 놀이 - 오징어 게임
마지막 여섯 번째 게임에 이르러 나는 '마사다(מצדה)'라는 이름 하나가 떠오른 후, 계속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마사다는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사해(死海) 서쪽 해안의 절벽을 이르는 명칭이다. 요새란 뜻의 히브리어다. 이 최후의 게임 오징어게임은 오징어 모양보다는 마사다의 산세를 더 닮았다.
높이 약 400m에 이르는 이 고대 요새는 유대-로마 전쟁 당시 최후의 격전지였다. A.D. 70년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최후의 유대인 저항군이 이곳에 피신했다. 지형이 험난하여 군단의 공격에도 3년을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은 버틸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들은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방법을 착안해 낸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적의 전리품으로 내줄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 960명은 먼저 각 가족의 가장이 자기 가족을 직접 칼로 죽이고, 그 다음 남은 전사들은 열 명을 제비 뽑는다.
그렇게 뽑힌 열 명이 나머지 사람을 죽이고, 열 명 중 다시 한 명을 뽑아서 그 마지막 사람이 남은 아홉을 죽인 뒤 자신만 자결하기로 규칙을 정한 것이다. 유대인은 자살을 금했기 때문에 착안한 모종의 게임이다. 즉 놀이이다.
▲마지막 놀이 '오징어 게임'에서 생존자가 혈투를 벌이고 있다. |
사람의 생명을 대상으로 어찌 놀이라 표현할 수 있는가 싶겠지만, 그것은 놀이에 비극이 포함된다는 원천 언어에 우리가 낯선 까닭이다.
1,000명, 아니 10,000명에 달하는 죽음의 비보를 접하더라도, 우리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거나 아무런 감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성이 부족하거나 덜 비극적인 죽음이라서라가 아니라, 놀이가 결여된 전달 방식의 탓일 것이다. 이는 "비극은 즐거움이다"라고 했던 시학의 작시법(Περὶ ποιητικῆς)과도 일맥상통하는 바로 그것이다.
놀이란 결코 노는 게 아니라고, 앞서 일러두었다. 그리고 그 놀이란 분명히 움직임이 있는 모종의 행위라는 사실도 일러두었다. 놀이가 결여될 때 우리는 1,000명, 10,000명..., 그 어떤 죽음도 달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가며 뉴스로 받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비극의 리듬을 통과한 주인공 기훈은 456억이라는 거액을 거머쥔 여섯 번째 놀이의 최후 승자가 되었음에도, 언제나 웃던 자에서 언제나 웃지 않는 자로 거듭나게 된다.
오징어 게임 속의 기독교 놀이
<오징어 게임>에서 빈번하게 출몰하는 기독교의 등장은 아마도 두 가지 중 한 가지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감독 황동혁에게 기독교에 대한 개인적인 깊은 상처가 있거나, 아니면 난데없이 튀어나온 주인공 기훈의 노사분규 회상 신과 마찬가지로 반기독교 플롯 따위가 제작비 조달과 회수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거나.
근래 한국 영화/드라마 감독들이 맥락에 어울리지도 않는 이념 플롯을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옴)로 잡아넣어 자기 작품의 흐름을 망치는 이유는 그것 말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감독 황동혁에게 이 지면을 빌어 찬사를 보낸다. 본인은 의도하거나 인식할 수 없었겠지만, 기독교의 본질을 성공적으로 묘사해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본인이 만들고도 몰랐을) 그 본질을 찾아드리고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줄다리기 게임에서 동일한 타이밍에 동일한 자세를 맞춰 힘센 자들의 힘을 이용하는 약자들. |
최후의 리듬, 종말
괴테는 <파우스트>의 입을 빌려 말하기를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 하지 않고,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고 하였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먹기 전에 자신이 독일어로 번역하겠다며, 요한복음을 펼쳐 들고 한 말이다.
파우스트는 첫 구절인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문장을 '말' 대신 '뜻'을 넣어보려다 여의치 않자 '힘'이라고 바꿔 보았지만, 다시 지우고서 '행위'란 단어로 고쳤는데, 바로 여기서의 '행위'가 리듬이다.
실제로 '말'(דָּבַר)이란 본래 '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행위를 일컬으며 그 행위는 더 구체적으로 '리듬'을 일컫는다.
최초의 행위는 호흡이라는 리듬이며, "태초에 '천지'(또는 빛)를 만들었다"고 하였을 때 그 리듬은 천지나 빛 따위의 명사가 아닌 "태.초.에.빛.이.있.었.다."는 문장의 리듬에 먼저 깃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는 첫 단계 리듬이었던 것이다.
처음 우리가 말을 배우는 이유는 죽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라 이 리듬을 타기 위해서 배우는 이치이다. 이 리듬을 우리가 '교육'이라 무른다. 교육을 죽이는 총질 행위로 인식한 것은 아마도 망상 내지 교육의 부재에 따른 여파였을 것이다.
플라톤은 <노모이>(Νόμοι, 법률들)에서 말하기를, 교육은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그 유래를 알려주고 있다(II. 653c). 교육의 부재는 많이 노는 아이들에게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놀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서 일어나는 행동의 양상이라는 방증이다. 교육(놀이)을 '총으로 죽이기'로 오해하고 자랐을 법한 황 감독처럼.
▲첫 번째 게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등장한 거대한 '술래 인형'. |
우리가 이와 같은 교육(놀이)에 충실했을 때, 비로소 쓰디쓴 훈계를 '달다'라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법률이 달도다"(시 19:10)라고 하였을 때 이 달다는 표현은 인민이 맞은 아편 때문에 생기는 감각이 아니라, 분명히 쓰디 쓰지만 달게 '들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단맛을 귀가 아닌 혀로만 느끼는 사람 역시 교육 곧, 놀이가 부재했던 환경에 기인한다. 일생을 핥으면서만 살아온 삶이다.
그러므로 놀이의 본질은 비극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단맛의 본질이 쓴맛을 머금고 있듯이.
이 드라마의 마지막은 장엄하다. 황 감독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가 알고서 이 장엄한 놀이에 닿을 수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가 묘사한 장엄함은 일종의 메피스토펠레스의 언어 왜곡과도 같은 데서 그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1번 참가자 오일남의 다이얼로그를 통해, 그 장엄한 놀이의 서곡에 다가설 수 있다. 이 모든 놀이의 창시자였던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그것은 재미가 없다는 거야. 재미. (돈이 없으면 없기 때문에 돈 쓰는 재미를 못 느끼지만) 돈이 너무 많아도 돈 쓰는 것이 재미가 없어...."
재미. 재미란 무엇일까? 호이징아가 말한 "(놀이 수행자를 지배할 수 있는) 자유로운 행위"였을까? 아니면 456(억 원)이라는 숫자가 가져다 줄 자유로운 행위였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드라마 속 456이란 기호는 단맛일 때만 작동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희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져올 자유는 웃지 못하는 억압일 따름이란 사실을 우리가 보았다. 그러면 대체 재미란 무엇인가.
▲1번 참가자 오일남이 게임의 목적에 관해 말하고 있다. |
'희망 신학'의 거장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정치와 사회적인 차원에서 과연 놀이가 자유와의 연속 관계 속에서도 현실을 전복시킬 수 있을지를 탐문하면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들에 화답할 때 우리는 재미, 즉 놀이의 실체가 무엇인지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왜 세계를 창조하셨는가?"
창조의 목적은 창조 자체가 존재를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기쁨의 표현이다. 바로 이 기쁨,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황 감독이 돈 때문에만 이 드라마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일 듯이.
둘째,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이 질의에 대한 답은 황 감독의 제1번 배역, 오일남의 게임 참가의 목적과도 같은 것이다. 마지막 참가자 456번이 죽음을 앞둔 1번 참가자 오일남에게 "대체 왜, 왜 이런 일을 벌인거야?! 왜냐구?!"라고 다그칠 때, 이 모든 놀이의 창시자인 제1번 오일남은 답한다.
▲1번 참가자 오일남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의 소회를 말하고 있다. |
"게임을 구경하는 것과 실제로 참여하는 것은 비교할 수도 없는 거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 되어 오신 필연성이자, 그분의 쓰디 쓴 비극인 동시에 희극이라 할 수 있다. 이 희/비극을 가리켜 우리가 자유라 부르게 된 것이다.
셋째, "역사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이 마지막 물음은 절규하는 456번 마지막 참가자의 계속되는 질의("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야?!")와의 연장선상에서, <오징어 게임>에 투영된 기독교 놀이에 대한 답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님의 비극과 희극에 상연되고 있는 이 역사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위로받지 못한 역사가 "하나님은 과연 옳으신가?"라는 절규와 갈망을 통하여 마침내는 희망으로 뒤바뀔 종말론인 까닭이다. 그 역사의 궁극적 중심을 우리가 십자가, 즉 기독교라 부른다.
다른 말로 하면 1번 참가자와 456번 참가자의 정체인 셈이다. 전자를 첫째 사람으로서 아담, 후자는 둘째 사람으로서 아담이라 예형지을 수 있겠다.
▲'설탕 뽑기' 게임을 하는 모습. |
놀이의 창시자 오일남은 놀이의 마지막 참가자 기훈과의 내기에서 결말을 보지 못하고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놀이 속에서 시종일관 믿음을 잃지 않았던 최후의 마지막 사람 기훈만이, 그 선하고 아름다운 결말을 본 것이다.
놀이의 목적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의미인 동시에, 목적이기도 하다. 이 리듬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것이 왜곡이다.
한 줄 평: "재미가 없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별점: ★★★★★
(다섯 개 만점)
▲이영진 교수. |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 | 크리스천투데이 칼럼니스트, 월간 《월드뷰》 편집위원 및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며, 연구 저서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요한복음 파라독스》를 발표했고, 역서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성서와교회연구원)를 내놓았다. 그리고 원어성경 학습 프로그램 파워바이블 앱 개발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