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그 예수님이 너무 좋았습니다. 너무 좋아서, 예수님께 베드로와 같은 심정을 고백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나를 위한 초막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주를 위해서라면 평생 이름 없는 자로 살아도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저만 신학교에 갔던 것이 아니라, 당시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청년들을 부추겨서(?) 함께 입학을 했습니다. 당시 제가 회장으로 섬기던 청년회는 주일에 25명 정도가 출석했었는데,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자기들을 부르셨는지 확신이 없다고 말하는 두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해서 혹 대단한 열매를 남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또 그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세 사람은 그렇게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교역자가 된다는 것이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고, 누려야 할 영광보다 견뎌야 할 고난에 관한 깊은 동의가 있어야 하는 일인데 영적으로 너무 어려서 몰랐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중도에 포기해야 했고, 신학교를 다녔다는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더 겸손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고,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경험할 때마다 했던 말들은, 그런 구호들은 그들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도록 만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면 누구든지 그 영광에 열광하고, 그 영광의 일부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런 저런 삶을 살겠다고 말도 합니다.하지만 정말 주를 위해 목숨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제 오후 정 선교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에서 값비싼 격리를 치루고 이제 루앙프라방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집'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곳을 집이라 부르며 가는데,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곳을 집이라 부르며 가려니 좀 외롭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짠했고, 미안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다시 좁은 길을 떠나는 정 선교사님이 고마웠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어떻게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내일은 꼭 위대한 믿음을 살아낼 것이라고 각오만 말하지 말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작은 순종을 시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장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