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신학대학원 신약분과 담당 이재희 교수
(Photo : 기독일보) 센트럴신학대학원 신약분과 담당 이재희 교수

"일년? 벌써?" 얼마 전 아침에 출근해서 이메일을 열어보니 필자가 원목으로 사역하고 있는 병원의 병원장이 코비드19 팬데믹을 선포한지 일년이 되는 날이라며 병원의 전 직원들에게 그동안 수고했고 감사하다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처음 팬데믹이 선포되고 병원에 코로나 환자들이 입원하기 시작했을때 모두들 긴장하고 불안해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코로나로 인해 늘어났던 사망 환자들, 방문자 제한 정책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의 임종을 지킬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많은 환자 가족들, 환자를 돌보다 코로나에 감염되었던 간호사들, 직접 방문을 자제하고 전화나 아이패드로 환자나 환자 가족들을 방문해야 했던 원목들. 그런 시간들을 지나 올 2월 중순에 들어서면서부터 확연히 낮아지는 코로나 환자들과 사망자 수를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우리는 지난 일년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잠시 멈추고 지난 일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잠깐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면한다. 팬데믹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불안감과 두려움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일상에 그럭저럭 잘 적응하며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드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바로 그것이 회복성(resilience) 이다. "회복성"이란 무엇이 원래의 상태로 복원되려는 탄성이다. 마치 고무줄을 늘리면 팽팽한 긴장감이 있지만 잡아당기는 손을 놓으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성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주 오래전에 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첫번째 수술로 잘 마무리 될 줄 알았는데 두 번째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나 두려워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병원의 원목이 나를 방문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어느날 가깝게 지내는 수술 전문의와 얘기를 나누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수술 과정 중 봉합을 할 때 바늘을 넣었다 뺄 때 몸에서 하얀 액체가 나와서 그 꿰맨 부위를 감싸고, 다시 바늘을 넣었다 빼면 또다시 하얀 액체가 나와서 그 꿰맨 부위를 감싸는데 만약 그 하얀 액체가 나오지 않는다면 봉합을 할 수가 없다면서 수술할 때마다 인체의 신비로움에 놀라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주시던 그 병원 목사님은 두려워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는 분이시니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마음을 편안히 하라며 용기와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그때 그 원목님께 감사했던 마음이 컸던 이유인지는 몰라도 생각지도 못했었지만 나도 병원원목이 되어 어느새 십칠년을 사역해오면서 많은 환자들을 만나왔는데 때로는 위로를 하러 갔던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오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그 환자분들의 "회복성"에 깊이 감명을 받게 되는 경우이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부활절 전날 방문했던  환자는 내 마음에 오래 남는다. 말기암을 앓고 있던 그 환자는 DNR (Do Not Resuscitate) 페이퍼에 사인하기 위해 채플린 (원목) 방문을 요청했다.

나는 이야기 도중 내일이 부활절이라 많은 분들이 새벽부터 세례를 받기위해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을텐데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 야외에서 부활절 아침에 세례 받기를 기다려온 많은 분들이 실망할 것 같다는 얘기를 그분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It's ok. God is baptizing the world. We are just grateful." 나는 비가 와서 세례를 못 받게 될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분은 같은 상황을 하나님이 세상 전체를 세례 주시는 것으로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이 아닌가! 그 신실한 모습에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마음에 감동이 일며 따뜻해졌다. 더군다나 그분은 이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심폐소생술과 같은 의료처방을 하지 말고 자신이 평안하게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게 하라는 DNR 페이퍼에 사인하는 중이었다.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또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그 환자분의 모습은 내게 "영적 회복성" (spiritual resilience)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영적 회복성"은 우리의 "참자아" (true -self)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자아"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 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다. 명예, 돈, 사회적 지위, 가족관계, 인간관계 등 많은 삶의 무게들을 감당하며 살아가다 잠시 멈춰서 돌아보면 너무나 지쳐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삶의 무게들에 눌려있는 내가 참자아가 아니라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굳세게 믿고 어려운 상황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려는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 내가 진정한 참자아라는 것 이다.

하얀 액체가 수술 바늘 자국을 감싸기 위해 흘러나오듯 우리 안에는 삶의 어떤 상황과 맞부닥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의 참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그 회복성이 흘러나오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영적 회복성을 가지고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좋은 본을 본다.

크리스천들이 잘 암송하는 성경구절 중에 하나가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이다. 이 구절만 본다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맘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이라는 상황은 그 앞 절에 쓰여진 구절들을 볼 때 조금 더 명확해진다.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즉,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그 상황에 따라 유동성 있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바울의 이 고백은 "영적 회복성"의 진수를 잘 보여준다. 상황에 의해 지배 받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탄력있게 자신을 조절해가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영적 회복성"이며 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선물이다. 이러한 "회복성"을 잘 발현시키며 살아갈 때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걱정거리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축복의 통로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될 것이다.

이재희 교수는 감리교신학대학교, 퍼킨스 신학교, 브라이트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맨스필드 감리교병원 원목실장을 맡아 사역하고 있으며 임상목회교육 (Clinical Pastoral Education) 수퍼바이저 과정중에 있다. 센트럴신학대학원 신약분과 담당 교수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