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하나님이 가족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에 대해 성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우선 결혼 관계에 대한 성서구절을 보면, 구약성서에서 아담이 하와를 보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사랑 고백하는 내용(창세기 2장 23절)이나,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가복음 10장 9절)라고 말씀하시는 내용들은 성서가 얼마나 결혼제도를 절대적 언약관계로 여기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뿐 아니다. 성서는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 부부 관계 뿐 아니라 부모 자녀 관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바울 서신에서 성서는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할 것을 명하며, 부모 역시 자녀들을 자신의 감정대로 대하여 노엽게 대할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훈계와 교훈으로 양육할 것을 명하고 있다(에베소서 6장 1-4절). 이러한 구절들을 보면 크리스천 부부사이 또한 부모 자녀사이에는 영적, 심리적으로 요구되는 윤리적 태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기독교는 가정을 대단히 중시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가족관이 반드시 핏줄을 중시하는 생물학적 가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를 더욱 명확히 선포하신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성령에 대해 가르치실 때였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과 누이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곳에 와서 예수님을 찾는다고 말해 주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너무나 밖에서의 사역이 많아 도대체 얼굴 보기 힘들어서 인지 성서는 분명히 언급하지 않지만 어쨌든 가족들은 자신들의 '가족' 예수를 보고 싶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둘러앉은 자들을 향해 질문하시고 선포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장 35절). 1세기 가부장적인 유대사회에서 예수는 새로운 가족관을 선포하신다. 생물학적으로 피가 섞인 혈연관계만이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영적 공동체, 영적으로 하나인 자들의 모임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21세기 관점에서도 급진적으로 보이는 예수의 가족관의 선포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요한복음을 보면 온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죽음 직전 십자가상의 마지막 사역으로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 어머니에게 사도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제자인 사도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신다(요한복음 19장 26-27절). 그리고 그 때부터 그 둘은 새로운 모자(母子)관계를 이루게 된다. 현대에도 아직도 입양이라는 형식을 통해 부모, 자녀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라고 보기 어렵고, 그러한 가족을 이루는 이들을 향한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것을 본다면 2000년 전 예수의 새로운 가족관의 선포와 형성은 기독교가 지향하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가족치료에서는 한 개인의 정신적인 어려움의 기원이 개인의 기질이나 기능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놓인 핵가족 그리고 나아가 3대 이상에 걸친 확대가족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인 심리치료와 달리 가족치료에서는 심리적인 어려움이라는 것이 개인의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상을 보이는 개인은 그 가족이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가시 환자(Identified Patient)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가족 중에 심리적 증상을 보이는 구성원은 집안의 문제적 존재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를 홀로 진 '희생양'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경우 치료적 개입은 그 개인이 아닌 그러한 희생양을 양산해 낸 가족 체계를 향한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변화가 있어야 증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가족 치료이론은 점점 가족 내의 체계 변화를 지향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가족의 체계적 접근을 통해 가족 구조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가족 외부의 관계의 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친구, 직장, 교회, 동호회 등과 같은 가족 밖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역시 개인의 심리적 증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부 관계 자원이 풍성한 사람은 치료적 예후가 더 좋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기존에 '가계도(genogram)'를 통해 개인의 심리적 증상을 야기하는 가족 내 역사를 탐색하던 것에서 가족 치료는 '생태도(ecomap)'를 통해 개인의 광범위한 관계의 망 탐색에 주력하는 것이다. 이는 점점 가족의 범위가 확대되어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예수가 2000년 전 선포했던 가족은 핏줄보다 관계적인 의미를 갖는 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혈족보다 심리적, 영적 충족감을 경험하게 해주는 폭넓고 긍정적인 관계가 더욱 가족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현대 심리치료가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인디언의 속담 중에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만이 내 자식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겠다. 또는 내가 낳지 않았다고 나 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내 자식 같다는 말도 되겠다. 자녀는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모든 척 해서도 안 된다. 우리 마을의 자녀는 모두 내 자녀라는 말이다. 서로 공생하며 도우며 공동체적 마음이 가족개념에 중요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2020년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생각과 감정과 삶의 자리의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살 냄새 맡으며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 어려워졌지만, 한편으로 온라인에서 우리는 세계에 일어나는 사건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싱가폴에서 코로나에 걸렸다가 회복한 임산부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코로나 항체를 갖고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코로나 중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소식이 우리에게도 삶의 희망을 주지 않는가? 그러나 여전히 지구 반대편에서는 물과 식량과 의약품의 부족으로 위태로운 삶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들의 소식도 듣는다. 가슴 저린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면 그야말로 전 지구적 공동체라는 한 마을에서 사는 우리는 모두 부모가 되어야 하고, 전 세계의 아이들은 내 아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지쳤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여전히 지치고 힘들지만 생명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으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는 우리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가고 계신다. 우리의 가족은 더 넓어지고 있다.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더 주변을 돌아보고 살피고 돕는 것, 코로나 시대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크리스천의 가족관이다.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코로나 시대 크리스천의 가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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