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명예, 학문, 사랑, 권력, 돈? 대개 사람들은 명예, 학문, 사랑이라고 대답하지, 돈을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이 점에서 너나할 것 없이 속마음을 숨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근래 들어 인기 있는 학과들을 보면, 모두 취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농대가 인기였습니다. 당시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었으니까요. 1960-1970년대 인기 있는 학과는 화공, 조선, 섬유과였습니다.

1980년대는 전기 전자과가 인기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제어계측과, 2000년대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경쟁률이 높았고, 지금은 생명공학 계통이 인기입니다.

이것이 말해 주는 것은 취직이 잘 되는 학과를 말합니다. 취직이 잘 되는 학과를 선택한다는 것은,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돈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돈과 삶은 '바늘과 실'과 같이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사실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선교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 낳고 돈 낳지"라고 하지만, 돈이 있어야 사람 대접받습니다.

속담에 "쌀독에서 인심 난다",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산다", "금강산도 식후경",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맹자는 《맹자》의 양혜왕(梁惠王)에서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란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야 윤리와 도덕이 선다는 뜻입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는 돈이 필요합니다. 2020년 추석 때 어떤 60대 여성이 "젊었을 때는 돈이 필요했는데, 나이가 드니 돈이 '참으로' 필요하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돈의 필요성을 인정하셨습니다.

성경은 돈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 돈을 사랑하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돈이 필요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골 3:5, 딤전 6:10).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과의 싸움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돈신, 맘몬과의 싸움입니다.

돈신과 싸워 이긴 사람, 돈지갑과 싸워 이긴 사람이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돈지갑이 회개할 때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까? 첫째로 돈은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내 주머니를 지나가는 하나의 정거장 정도로 여겨야지, 돈을 내 지갑에 영원히 붙들어 매고자 하면 되지 않습니다. 왜 돈이라고 부릅니까? 돈은 돌고 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돈을 계속 붙들어 매고자 하는 사람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

이 말씀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면서, 무엇인가를 움켜쥐고자 손을 움켜쥐고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돈을 법니다.

우리가 이를 악물고 70-80년 동안 돈을 벌지만,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서양 속담에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주위 사람들의 삶에서 늘 보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원한 것에 투자하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데 있습니다. 이럴 때 후손들에게 값비싼 유산(legacy)을 남길 수 있습니다.

반면 가장 추한 삶은 안개처럼 사라질 순간과 일시적인 것에 투자하고 그것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돈을 사랑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돈에는 사람을 미혹하는 마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소유한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돈이 없다고 의인이고, 돈이 많다고 죄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필요 이상의 돈을 목적으로 삼고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돈을 목적 삼고 추구하는 그 순간부터 온갖 시험과 죄에 빠지게 하는 미혹의 입구가 내 앞에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딤전 6:9上)"

돈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돈이 있어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문제는 필요 이상의 돈을 많이 움켜쥐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필요 이상 돈을 움켜쥐고자 하는 순간, '돈'이 우리를 부패시키는 우상이 됩니다.

돈이 많으면 과시욕이 생기고 사람을 허황되게 만들고 세상을 즐기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적으로 풍족하기를 원한다면 그와 비례하여 10배의 높은 가치관과 도덕과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돈을 사랑할 때 파멸과 멸망으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下)".

'빠지다(ruin)'는 침몰한다, 파산시키다, 폐허로 만들다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가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된 것도 돈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딤전 6:10).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므로 이를 뽑지 않으면 우리의 내면에서 죄가 꿈틀거립니다. 대개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돈을 사모하여 미혹을 받아서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부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근심이 많아집니다(딤전 6:10). 돈을 벌기 위해 고심하고, 번 돈을 지키기 위해 또 근심합니다.

그래서 '부를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비유합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장미꽃을 추구하다 그 줄기에 붙어있는 가시에 찔리게 됩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유명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장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장미꽃을 꺾다 가시에 찔려 파상풍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부를 추구할수록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익보다 부의 가시에 찔릴 위험성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의 빈대가 남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돈맛을 알면 누구든지 타락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향한 삶의 깊이가 더 깊어져서 성숙하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필요 이상으로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을 언제나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필요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하다고 했습니다(딤전 6:8). 그것이 필요의 기준이었습니다.

청교도의 고백은 이러하였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주어진 것, 그것은 우리로 두 가지의 책임을 갖게 합니다. 하나는 감사해야 할 책임이고, 또 하나는 나누어야 할 책임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필요 이상으로 주신 것은 이웃을 돌아보고, 뜻이 있는 곳에 써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손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최대의 수치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대신 학교를 세우고, 장학사업을 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물질을 드렸습니다. 인하대학교도 초기 하와이로 이민을 갔던 인천 내리교회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금으로 지어진 학교입니다.

이영호는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 없게 하라>에서, 경주 최부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한국판 교범으로 불린다고 했습니다.

경주 최씨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훈 6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과거시험은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둘째,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셋째, 과객(過客)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라.
넷째, 흉년에 땅을 사지 마라.
다섯째, 며느리가 시집와서 3년간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여섯째, 사방 100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같은 가훈에 따라 최부잣집 사랑채는 늘 과객 수백 명의 숙식으로 붐볐다고 합니다. 지금도 최부자의 손자 최염은 선대의 가훈에 따라 후손들이 명문가의 명예를 한 치 어김없이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물질관은 '비목적(非目的)', '비죄악(非罪惡)', '비중심(非中心)', '비우상(非偶像)'입니다. 물질은 내 삶의 목적이나 중심이 아닙니다. 물질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물질 자체는 우상이 아닙니다. 물질이 목적이 되고, 중심이 되고, 물질을 사랑할 때 죄가 되고 우상이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소유로 판단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은 부채가 없는 30평대 아파트, 월 급여 500만 원, 2000cc 이상의 중형차, 통장 잔고 1억 원, 1년에 해외여행 몇 차례 등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산층 기준을 소유로 판단합니다.

반면 미국의 중산층의 기준은 자기주장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고, 사회 약자를 배려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는 것 등으로 판단합니다.

자기주장을 떳떳하게 펼치려면 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많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가지려면 따뜻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마음, 부정과 불의에 저항하려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과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비평지를 읽는다는 것은 순치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기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청지기 사명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청지기, 복음의 청지기, 물질의 청지기입니다.

필자와 필자의 아내는 김상복 목사님의 사모님으로부터 물질의 청지기 자세를 새롭게 배우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루마니아 김다윗 선교사가 2019년 봄 백내장 수술과 녹내장 치료를 받기 위해 귀국하여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김다윗 선교사와 김레베카 선교사의 비행기값과 치료비가 적지 않게 들었습니다. 사모님이 이를 아시고, 두 사람의 비행기값을 보내주셨습니다. 필자의 아내가 이를 감사하여 인사를 드리니, 사모님께서 이런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맡겨주신 것을 필요한 곳에 쓰시도록 심부름한 것뿐이라고 전해 주세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움켜쥐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한 곳에 쓰도록 맡겨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질의 욕망과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청지기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남식 목사(인천 대학마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