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잉글랜드를 개척했던 청교도의 처음 세대가 세상을 떠나갈 무렵에, 대표적인 두 인물 중 한 사람인 주지사였던 윈트롭은 1646년에 서거했고, 보스톤 제일 교회 담임목사 존 코튼은 1652년에 사망했다. 이처럼 뉴잉글랜드에서 저명한 지도자들의 세대교체의 시기와 맞물려서, 잉글랜드에서도 거대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다. 뉴잉글랜드의 첫 백 여 년의 역사 중 중반기와 후반기에 이르게 되면서, 즉 1660년부터 1730년까지 사이에 서서히 변질되어갔다. 동시대에 잉글랜드에서 먼저 정치적 변고가 발생했으니, 청교도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이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왕당파 귀족들의 권모술수에 의해서 1660년에 찰스 2세의 왕정복고가 이뤄졌다. 새 국왕은 약속과 달리, 강력한 국가교회 체제로의 복귀를 시행하였기에 이제 더 이상, 잉글랜드에서는 이전 세대의 청교도 신앙은 전혀 용납되지를 않았다.
뉴잉글랜드에서도 제 2세대와 3세대 지도자들이 등장하여, 영국의 통치자와의 타협을 모색하게 되었다. 여전히 초기 청교도들의 신앙지침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1648년,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교회 조직에 관련한 규범으로 "케임브리지 강령"(Cambridge Platform)을 제정하였다. 칼빈주의 신학을 기초로 하되, 장로교회와는 달리 회중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강조하는 입장과 생동감이 넘치는 체험적인 청교도 신앙이 반영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근간으로 채택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자하는 언약적인 의무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금식의 날과 기도, 감사절의 전통을 유지했다. 존 코튼과 뉴잉글랜드 초기 지도자들 (Richard Mather and Ralph Partridge of Duxbury)의 지침에 따라서 거의 모든 사회생활 전체가 청교도 운동의 활동방향에 따라서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러나 큰 변화가 초래된 것은 청교도의 후예들이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그대로 생활 속에서 날마다 실천하여 나갈 것인가의 문제였다. 첫 세대는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로 먼저 교회를 짓고, 그 다음에 학교를 세웠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집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세대, 또 그 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그러한 개척자들의 강인한 청교도 신앙이 없었다. 젊은 세대들은 더 어린 나이에 집을 분가해 나갔고, 이로 인해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어졌다. 1650년대와 1660년대에 유아세례를 받은 세대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복음과 접촉해서 성장하도록 지도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점차 수많은 청교도들의 후손들이 유아세례를 받은 교회를 떠나서 대도시로 집결하면서, 옛 신앙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어졌다.
뉴잉글랜드 청교도 집안의 후손들이 어떻게 변화해 갔는가는 존 윈트롭의 가정이나, 리처드 매더 가문을 살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제 2세대를 거쳐서 3세대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보여준다. 청교도 지도자 집안으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집안이 바로 매더 가문이다.
리처드 매더 (Richard Mather, 1596-1669)는 청교도 목회자이자, 회중교회 제도를 옹호하였던 지도자였다. 잉글랜드 리버풀에서 태어난 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했고, 1619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찰스 1세의 정책에 서명하지 안했기에, 1633년 정직을 당했다. 1635년에 보스톤에 정착했고, 회중교회를 지지하면서 새뮤얼 러터포드와 논쟁을 했다.
인크리즈 매더 (Increase Mather, 1639-1723)는 리처드 매더의 아들로 성장하여,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다시 뉴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보스톤 "제2교회"의 교사로 평생을 봉직했다. 1674년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후에 총장으로 선출되었다가 1701년에 퇴직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 과학 분야 학과목을 개설하였다. 약 130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중에 아버지의 전기도 있다. 인크리즈 매더는 뉴잉글랜드의 쇠퇴를 걱정하면서, 솔로몬 스토다르드(요나단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가 주장하던 보다 더 자유로운 방식에 대해서 비판했다. 옛 회중교회의 방식과 신학을 고수하고자 분투노력했다. 인크리즈는 존 코튼의 딸 마리아 코튼과 결혼하였고, 그 아들이 코튼 매더이다.
코튼 매더 (Cotton Mather, 1663-1728)는 청교도 목회자이자 신학자로 활약했다. 1678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학위는 1681년에 받았다. 아버지의 동료 목사로 보스톤 제2교회에서 섬기다가,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코튼 매더는 469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살던 시대의 보스톤 지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언급한 것들이다. 1620년에서 1680년까지의 뉴잉글랜드 교회의 역사에 대한 것들도 많이 남겼다.
코튼 매더는 전통적인 방식을 옹호하면서도, 뉴잉글랜드 교회에 변화가 불가피하며,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일생동안 그가 관계한 다양한 분야에서 경건하고도 깐깐하며 다소 건방지다는 평을 들었다. 여러 명의 주지사들과 교제를 하면서, 정치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예일대학교의 설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후원했다.
새뮤얼 매더 (Samuel Mather, 1706-1785)는 코튼 매더의 아들이자, 보스톤 제2교회의 설교자로 섬겼다. 하버드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예일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글래스고우 대학교에 건너가서, 석사학위를 마쳤고, 훗날 애버딘 대학교에서도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는 그에게 1773년에 신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보스톤에 새로운 교회가 설립되자 (the Tenth Congregational Church) 담임목회자가 되어서 1785년까지 섬겼다.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은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이 초창기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물론 상호간에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평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배면에는 선교적인 관계성을 갖고자 노력한 사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1663년에는 존 엘리엇(John Eliot)이 원주민들의 언어로 번역한 성경이 출판되었다.
1690년 이후로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전쟁을 하게 되었고, 그 여파가 뉴잉글랜드에도 퍼졌다. 유럽 대륙으로부터 "계몽주의" 운동의 확산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철학자들의 이성중심주의가 뉴잉글랜드의 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또한 실용주의라는 미국적 철학은 개인주의 (individualism) 시대를 향해 문호를 활짝 개방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응하는 방안이 뚜렷하지 못했고,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과 체험적인 종교현상들이 성행하였다. 안타깝게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유주의가 영향을 끼치게 되자, 하버드 대학에서는 "성부 유일 신론주의" (Unitarianism)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이 늘어났다.
1730년대에 요나단 에드워즈가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을 통해서 새로운 갱신과 부흥을 주도하면서, 청교도 신앙이 다시 회복되었다.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군사작전의 승리로 인해서, 1776년 미국은 완전히 자유 독립국가임을 선언하게 되었다.
맺는 말
한국교회에 소개된 기독교복음은 최초의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청교도 신앙의 후예들이 헌신적으로 심어준 진리들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약속을 지키고자 전심전력하던 청교도들은 교회와의 언약을 실행하면서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모든 청교도들은 "뜨거운" 성도들이었다. 청교도의 열심, 자기 목숨을 던져서 국왕과 국가교회를 거부했던 정신을 이어 받아서, 찬란한 유산을 남겼다. 사회를 갱신하고, 심령의 부흥과 회심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 세계에 확산하기 위해서 선교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금도 미국교회가 전 세계에 최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배경에는 청교도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여준 청교도 신앙의 자양분을 충분히 활용하여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