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득하기 어려운 불행이나 재난이 닥쳤을 때, 사람의 일반적인 반응은 원인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아들을 갑자기 잃은 한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자기 죄 때문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를 자기 집에 들인 탓에 그 형벌로 아들이 죽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건전한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아이를 안고 다락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여인은 살아난 아들을 보면서 나의 죄를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형벌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왕상17장).
코로나 팬데믹을 무능한 정부 탓이나, 사람들의 부도덕한 생활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이 본인의 죄 때문인지,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도 죄를 짓지 않았고, 부모도 죄를 짓지 않았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보이시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셨습니다(요9장).
남들이 코로나에 걸리든 안 걸리든 내 알 바 아니라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나 네플릭스를 보면서 내 인생을 즐기면 된다고 여길 수 있고,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파티를 즐깁니다. 또 다른 반응은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산다는 식으로 운명론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일부 크리스천들은 선교의 기회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일부 사람들은 평소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코로나 때문에 더욱 비방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우리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먼저, 기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과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에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한 기도도 빼놓지 않아야 합니다. 두번째 우리가 할 일은 조용히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남 모르게 숨어서 행하는 자선과 봉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지 않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많지 않을까요? 코로나 이전에도 외롭던 분들은 더욱 고독해졌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분들은 더욱 힘들고, 환자들은 더욱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친구가 필요한 분들이나 초라해졌다고 느끼는 분들께 사랑을 실천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