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기독교 국가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양식은 우리가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종교적 가정(assumption)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 사유권, 자선, 사랑, 의무, 정직 등에 대한 신념은 모두 종교적 원천이 있다… 미국에서 그 종교는 기독교이다.”
위 글은 미국 보수주의를 정립하고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러셀 커크(1918~1994)가 1957년 출간한 ‘The American Cause’(미국의 대의)에 쓴 것이다. 커크는 160쪽 정도 되는 이 짧은 책에서 두 챕터를 할애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의 원죄 등을 포함한 기독교의 기본 교리와 유대기독교 가치관에 뿌리를 둔 미국 공화국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을 쓸 때 그는 공식적으로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러셀 커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넷(Annette Kirk, 1941~)과의 결혼을 앞둔 1964년에야 세례를 받고 공식 입교(入敎)했다. 하지만 사실 커크의 ‘개종’ 시점을 특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넷을 만남으로써 세례를 받을 계기를 얻게 되었지만, 사실 커크는 인간 상위의 권위에 대한 오랜 경외심과 깊은 묵상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서서히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은 어떤 ‘거듭남’의 순간을 체험하기보다 단지 “어느 순간 자신이 이미 크리스천이었음을 알아차렸다”고 회고했다.
청년 시절 스토아철학에 매료되어 있었던 커크가 처음 신의 존재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은 1942년 유타 사막의 열악한 환경에 처했을 때로 보인다. 그는 당시 불모의 척박한 사막에서 “잠잠히 자신을 덮는 임재를 의식”했고 엄습하는 두려움 가운데 “진정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기록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박사과정(1948~1952)을 밟으면서 중세 교부들의 글과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과 같은 신학자들의 저작을 두루 섭렵하기도 한다. 특히 이때 그가 매료된 성 어거스틴의 사상은 그의 추후 저작들에 중요한 지적 중추를 이룬다. (그는 그의 세례명을 ‘어거스틴’으로 정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보수의 정신>(1954)을 출간한 이후로는 예수회 신부 휴그 오닐(Hugh O’Neill)과의 문답을 통해 신학적 배움을 얻고 기독교의 교리를 지적으로나마 받아들였다. 또한 영적세계에 대한 커크의 깊은 관심은 몇 편의 유령소설로 표출되기도 하는데, 특히 1961년에 출판한 ‘Old House of Fear’(오래된 공포의 집)는 그의 다른 모든 저작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그는 현대 과학의 발달로 문학세계가 과도하게 유물론적 상상에만 치중되었다고 판단하고 고전적인 유령이야기를 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무엇보다 커크의 신앙적 성숙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교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하다. 커크는 말년에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 1925~2008)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의 부활과 영생을 예시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의 신들이나 에픽테토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혹은 세네카를 따르는 것과 다를 바 없네.”
커크가 과연 언제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혹은 얼마나 진정한 크리스천이었는지는 여기서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신앙의 확신이 뚜렷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유대기독교적 가치관이 그토록 깊이 배어있는 여러 대작들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과, 이 의외의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먼저 커크가 오로지 개인의 영적체험과 역사의 경험, 그리고 선조들의 가르침을 관찰하고 숙고함으로써 그의 보수주의적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함의점이 있다. 바로 보수주의 가치는 역사와 양심 앞에 겸손함과 진지한 성찰의 태도만 견지한다면 모든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즉 일반은혜(common grace)의 영역에 있는 인류보편의 가치라는 것이다. 커크는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와 죄성을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도덕적 책무를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며 영원을 추구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그가 보수주의의 창시자라고 여겼던 에드먼드 버크(1729~1797)가 인간의 “도덕적 상상력”(moral imagination)이라고 표현한 그것이다. 커크는 이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음을 나타낸다고 썼다.
이것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양심’의 개념과 일치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9, 20).” 여기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를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phaneros en autois”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를 영어로 직역하면 ‘evident-in-self”’가 된다. 바로 미국의 독립선언문(1776)에 적힌 “자명한 것(self-evident)”이라는 표현의 근거다.
마지막으로 커크가 어떻게 신앙의 확신이 없이 이 저작들을 써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반대로 커크가 초기부터 믿음이 강한 크리스천이었다면 과연 이렇게 깊은 성찰과 풍부한 역사적 추적이 담긴 대작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를 물어보면 힌트가 나온다. 사실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이었다면 그토록 인류역사를 망라하는 풍성한 작품을 오랜 기간에 걸쳐서 고뇌하며 쓰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보수주의의 진리는 특별은혜, 즉 계시라는 지름길을 통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커크는 그가 죽고 일 년 후 출간될 그의 자서전 ‘The Sword of Imagination’(상상의 검, 1995)의 부제를 “반세기 문학적 갈등의 회고”(Memoirs of a Half-Century of Literary Conflict)이라고 붙였다. 그는 그가 “도덕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그의 양심의 검을 사용하여, 자신을 묶고 있는 “죄의 법과 싸우고(롬7:23)” 또 “생각이 서로 고발하며 변명하는(롬2:15)” 힘겨운 50년의 세월을 보내며 보수주의라는 틀을 통해 복음의 보편성을 증명했던 것이다. (계속)
조평세 박사(북한학, 트루스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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