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자들의 설교 내용에 꽤나 큰 문제가 하나 있음을 본다. 그것은 '조건문의 율법적인 설교'가 너무 많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나아가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내용의 설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찾지 않는다면 그분도 우리를 외면하실 거란 말이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유명한 문장인데, 목사들이 설교 속에 자주 인용하는 명문장으로 통해왔다. 하지만 이 내용만큼 율법적이고 비성경적인 문장이 없음을 거의 모두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우리 편에서 먼저 최선을 다하는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처럼 말인가?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처럼 말이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2-4).
예수께서 자기 마을로 지나가신단 말을 들은 삭개오가 취한 행동을 보자.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당시 지체 높은 사람으로서는 하지 않는 "앞으로 달려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래도 키가 작아 볼 수 없으니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수치를 감내하면서까지 예수를 추구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3대지로 설교하는 이들이 즐겨 설교개요로 만드는 내용이 아니던가? <축복 받는 세 가지 비결이란? 첫째, 삭개오처럼 영적인 갈증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삭개오처럼 주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셋째, 삭개오처럼 수치를 무릅쓰고 겸손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것이 '조건문의 율법적인 설교'의 전형이다. 본문에서 '주님을 추구한 삭개오'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너무나도 비성경적인 관점에 자신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누가복음 19장 2절부터가 아닌 1절부터 본문을 파악하는 눈을 키워야 한다.
1절의 내용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무슨 말인가? 삭개오가 주님을 추구하기 이전에 예수께서 삭개오란 사람의 영적 갈증을 아시고 그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시기 위해 여리고로 들어가셨단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19장 10절은 누가복음의 주제 구절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동네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고 내침을 당하고 조롱과 조소 속에 살았던 고독하고 불쌍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추구한 삭개오보다 삭개오를 구원시키시기 위해 찾아오셔서 먼저 대화를 시작 하신 예수님의 의도와 행동이 선행되고 있음을 보지 못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선행적인 은혜 선포와 구원 선포가 아니었다면 구두쇠 삭개오의 지갑은 그렇게 크게 활짝 열려질 수 없었음을 반드시 기억하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가 성경적 내용이라고? 그게 맞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열심히 노력하고 선을 행하면 부처가 되고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점이 뭔가? 타종교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살면 신도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신다는 교리다. 반면 우리 기독교의 차별성과 유일성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선포하신다는 내용이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이 내용을 성경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보자. 'Heaven helps those who cannot help themselves.'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능력이 없는 자들을 도우신다.'
그렇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도 없고 구원할 수도 없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이다. 요일 4: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한다.
오늘 설교자들의 설교 속에 조건부의 율법적 내용이 너무 많다는 지적에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진 후엔 모두가 자신의 설교내용이 심히 율법적이라는 사실에 충격 받음을 본다.
그렇다. 오랜 세월 은혜의 복음이 나아가는 방향을 정리하지 못한 채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해왔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설교의 방향이 어떤 식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잘 점검하여 성경적인 복음의 방향대로 설교함이 지혜와 복이 될 것이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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